삶이 무거운 이에게
text / 2008/09/27 10:48
엄숙한 자들, 진지한 자들에게는 우리의 실험이 실패들의 연속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끊임없는 여정 자체를 실패의 증거로 삼을 것이다. 우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피로를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실패들은 우리의 성공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무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할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이전의 실패들, 이전의 성공들로부터 쉽게 떠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웃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웃으면서 시작하자고 말한다.- 고병권 이진경 외, <꼬뮨주의 선언>, 교양인, 2007, 머리글 중에서(31쪽).
우리의 믿음들 전부 혹은 그 일부분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가능하며, 따라서 모든 믿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의심의 요소를 가지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다른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믿음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질 수 없다.
- 버트란드 러셀, 박영태 역, <철학의 문제들>, 이학사, 2000년, 58쪽. (강조는 발췌자)
신영복 선생님은 자유(自由)가 자기의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남이 입는 남의 이유를 긍정하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자기가 남의 이유를 입거나, 남이 자기의 이유에 굴복하는 일을 벗겨내고 발라내고 구분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순도 100%는 아닐지라도 좀 더 자유롭고 날개짓이 힘찬 사람들끼리 만나 이야기하는 자리는 그렇지 않은 곳보다 희망차고 바람직하고 무엇보다 행복하다.
그러나 개무시하는 것과 다양성을 존경하는 일은 정말 백지 한 장 차이.
예컨대 동전에 양면이 있으니 어느 쪽도 옳다는 주장은 그 주장 자체 또한 언제나 아닐 수도 있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동전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소리이다. 모든 소리에는 말하는 사람의 이유와 자격이 문제된다. 이유를 거세하고 동전만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의 테이블에 자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기의 이유로 동전을 잘 이야기해내고자 하는 성실한 사람만이 대화의 상대로 적합하다.
주목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을 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동전의 뒷면을 말하려는 자세이다. 앞면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동전의 뒷면에 대한 것은 신앙이나 신뢰, 또는 혐오, 기피와 같은 심리적인 면이지 실천과 논의의 면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자의 시선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거나, 자기는 여자이면서 남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해석한다. 이것은 모순과 분열이지 다양성이 아니다. 다양성은 아무 꽃이나 꺾어서 묶어놓은 꽃다발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물 먹고 자라는 꽃들에 대한 존경이다. 꺾인 꽃들과, 꽃인척 하는 것들에게 다양성의 이름을 주지 말라. 다양성은 비다양성이라는 하나의 항목을 결여할 때만 다양성이다. 비다양성의 자리가 없고 비다양성이 오늘 식사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배고픔에 책임의식을 느끼고 미안해하지 말라. 비다양성은 원래 혼자 잘 먹고 잘 논다.
두번째 문제는 살아있는 꽃이라고, 무늬가 꽃이면 다 꽃인가?라는 물음이다. 예컨대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등의 스펙트럼은 여러가지 꽃의 모습인가 아니면 좋고 나쁨의 위계서열인가?
이 문제에 대한 내 답은 간단하다. 다 지 꼴리는대로 사는 거다. 자유로운 사람들조차도 살다보면 얼마나 자유로울지 얼마나 보수성을 입을지 고민하고 여러가지 옷 중에 하나를 골라입는다. 물론 이런 상황은 참 슬픈 상황일 수 있다. 특히 도덕적 공동체주의자들(알데스마이어 같은)처럼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성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17세기 뉴턴의 정합성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 다 자기 생각만 있구, 니 소리 개소리, 내 소리 꽃소리.. 그 소리는 다시 어떤 사람에게는 개소리.. 그냥 시끄러운 소리만 가득하게 살면서 가는 거라면 도대체 우리의 사회는 무엇이고 우리는 왜 계속 논의해야만 하고 왜 대화해야만 하는 것인지... 공동의 객관이 붕괴된 소통은 누구와 누구의 소통인가? 참으로 개탄스럽고 절망스럽고 ... 책임은 없고 윤리는 실종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본부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보다 좀 더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항해를 위해 거지같은 옷을 입고 다시 배를 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또라이나, 결벽증 또는 부적응아라고 부르지만 ...... 바로 이 작은 사람들의 진심 속에 혁명이 있다.
사람들은 큰 혁명은 잘 보지만 작은 기쁨과 내 안의 이유로 내 바운더리를 책임지는 것이 왜 세계를 책임지는 것이 되는가를 잘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나 또한 눈이 어둡고 매일 진정한 삶의 책임 대신 '업무'에 이끌려 살고 있는 소시민이기에 매일 나의 아둔함을 어둡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고 , 그 자유를 입고 싶어하고, 길을 걷다가도 노래하면서 마음에 품어 나에게 묻고는 한다. 이 모든 것을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정해진 기준을 들이대면서 부족과 미성장과 결여를 말할 때 그 부족을 부족하게 하며, 미성장을 미성숙하게 하고, 결여를 결여할 마음의 준비. 그래, 결여를 결여하는 마음의 준비.
삶은 나에게 땅으로 꺼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르고자 할 때 느낄 수 있도록 중력으로 거기에 있다.
길은 생물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었다. 길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만남은 또다른 길로 태어났다. 길 위에서의 초대가 길을 이탈하게도 했고, 오히려 길을 잃고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 마침내 길은 우리더러 설계도를 그만 내려놓으라 했다. ... 스스로 길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 김향미, 양학용 공저,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위즈덤하우스, 2008년, 7~9쪽에서 발췌.
꺼지지 말고, 울지 말고, 근원과 진리에 대한 질문은 너무 많이 오래 하지 말고,
길 위에서 재밌는 실험을 계속 하자. 가벼워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거운 것은 더 어렵고 슬프다.
여정을 멈추고 길 위에 주저앉아 잠드는 순간 너는 꽃다발의 꽃으로 박제된다.
그대, 웃으면서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태양을 향해 꽃을 피우고 날개를 펴라.
첨언. 글 중 한나라당은 제외한다. 혼자 잘 노는 비다양성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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