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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예수가 겨울비에 젖어 운다.

숨어 있는 예수

text / 2009/07/06 23:57



<숨어있는 예수>의 저자 블룸하르트는 노동자 권익문제에 관심을 쏟다가 목사직에서 파문되었다. 이 책은 그가 중국에 선교사로 간 딸과 사위에게 1898년부터 1914년까지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는, 블룸하르트가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고민하던 숨어버린 예수의 문제를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또 한 명의 사람 본회퍼가 이어받아 고민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 사람들은 블룸하르트에게서 열정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관찰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00주의' 따위를 붙이기 좋아하는 서지학자들의 작업에 가까운 것이고, 블룸하르트 그 자신은 "어떤 신학 이론도 펼치지 않았다."

종교 사회주의, 변증법 신학의 기원. 칼 바르트, 자크 엘룰, 본회퍼, 몰트만 등등의 현대신학자에게 먼저 등불을 켜 주었던 블룸하르트의 관찰은 신학적 변혁을 염두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온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왔어. 세상은 그걸 경험하게 될 거야.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에 답을 할 진정한 그리스도가 분명히 올 거네. 선교사는 종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 예수의 이름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면 그만이야.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원충연 옮김, <숨어있는 예수>, 달팽이출판, 23쪽.

예수가 중요성을 분명하게 선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서 끝에는 속이고 마는 마술을 예수의 기적들과 구별해야 하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불행 앞에서 손을 놓고 있는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도움과 회복의 힘을 주는 아버지라는 걸 분명히 알려야 해. 예를 들어 예수가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다는 얘기를 할 때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배고픈 사람들과 아프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35-36쪽)

죽음을 이긴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어 하고 있어. 그러니 특정 종교를 위한 선전에는 관심이 없지. 자네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비추는 복음을 당당하게 대표해야 하네. (47쪽)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고 그의 정의를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기초 위에도 짓게. ...(중략)... 매일의 삶과 실제 생활에서 바로서기를 실패한 종교 공동체들은 곧 크게 실패해서 없어지게 될 거야. (54쪽)

자네가 놀랄지 모르지만 우리가 설교를 할 때는 종교 지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야 하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는 더욱 더 사람들이 그걸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해. 사람들은 진정으로 활동하고 이웃들과 함께 성취하는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해. (55쪽)

많은 기독교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왜 기독교 사람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몇 안 될 거야. 진정한 복음이 아닌 것들을 너무나 많이 설교하고 있어. ...(중략)... 혹시 우리는 이교도들처럼 죽고 난 다음의 행복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땅을 버리고,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들처럼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축복된 죽음일 뿐이지. (79쪽)

자네의 무력함 때문에 오히려 문이 열리는 것을 기뻐하게. 그곳에는 중국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원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네. 하나님의 성령은 중국 사람들한테서 나와야 해. (117쪽)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게.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어울리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중략)...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늘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게. 성령 안에서 자유롭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인간적인 선택에서 자유로워지게. (119쪽)


물론 블룸하르트의 서간문 전체가 신학적 짜임새와 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약점일 수 있겠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제국주의적 힘으로서의 종교가 복음과 대립하는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아끼고 있을 때, 블룸하르트는 "나는 약한 사람의 편이다", "종교 따위 무슨 상관인가?"와 같은 도발적 발언을 던지고 스스로 선교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것은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공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삶의 태도가 결국 현대성과 영합하여 종교를 희석하고 신앙을 잃게되는 -- 오늘날 유럽교회의 일요일 빈 좌석을 보라 -- 비극을 예견케 하였으나, 어떤 사람은 블룸하르트에게서 본회퍼로 이어지는 이 태도로부터 배워 현대적 신앙인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 소개된 원충연님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는 미국 뉴욕주의 산마루Woodcrest 공동체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귀국해서 성북동에 살고 있다.


... 한국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공동체에서 보낸 두 명의 젊은이와 함께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지만 여전히 우리는 거창한 계획 없이 살고 있다. 자연 속에 지워진 아담한 집에 아니라 거대한 서울의 한 다가구 주택에서 산다. 일을 하고, 아내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람에 대해 배운다. 동네와 동네 뒤로 난 산길을 따라 산책을 다닌다.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고, 작은 모임을 열어서 노래하고, 성서나 다른 글을 읽고, 함께 밥을 지어 먹는다. 노래를 하고 놀이도 하면서 흥에도 취한다. 물론 지지고 볶고 토라지고 용서하고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갈라져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를 이루고 살 수 있기를. 블룸하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들을 품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꿈꾸기를.
- 같은책, "옮긴이의 말", 141쪽.


내 꿈도 그렇다. 꼭 귀농하지 않아도, 매연 사이의 허름한 방과 거리를 오가며 사람들 많이 만나고 싶다. 나는 계획하지 않기로 계획한다. 마을 공동체의 복원이 불가능하다면, 옆집 사람과 엘리베이터에서 목례라도 건네면서 재밌어지고 싶다. 무슨 일이든 일터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다른 종교, 다른 나라 사람을 가끔 만나면 열심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싶다. 보도블럭 사이에 핀 민들레나 우리학교에서 새끼를 낳은 고양이와 사귀고 싶다. 요리를 몇 가지 더 배워서 몇 명을 초대해 밥도 해주고 싶다. 작은 모임을 열어서 같이 노래도 부르고 싶다. 성서를 읽을 것이다. 술을 정말 많이 못하지만, 누가 울면서 전화하면 나가서 밤새 퍼마셔 주겠다. 열받으면 블로그에 또 욕 쓸 거다. 그러다가 미안해지면 찌질하게 전화기 끄는 대신 진심으로 사과할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게 어린 아이일지라도.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한 십년 후에는 나랑 영혼의 더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많으면 좋겠다. 그게 노인이든, 다섯 살이든. 그리고 종교와 성별과 성지향성과 고향에 상관없이 모두가 서로의 인간다움에 공감하며 평화를 이루고 사는 삶은 반드시 한 발자국씩 가까이 오고 있다고 사실 믿고 있다(나는 병신같을지라도!).  본회퍼가 죽으러 가기 전에 감옥에서 누구의 손을 잡고 그의 마음을 위로했듯이, 나는 내 상처가 곪을 때마다 그것을 치료해달라고 하는 대신 타인의 상처에 더욱 민감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내 상처를 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블룸하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라면 모두모두 품어주는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아멘."




Posted by 서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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