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공부) 인간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시는 하나님
text / 2009/11/16 09:24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 합니다.
입장의 동일함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中
(아래 글은 예가교회 펴냄, <교인되기>, "10.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에 대한 감상)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계약정신은 상호 양보를 요구합니다. ...(중략)...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양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약하므로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인되기>, 81쪽.
나는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입장의 동일함"과 성서의 계약(testament)을 비교해 봅니다.
사실 어떤 기독교인에게 성서에서 인간을 구원할 때 약속과 계약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불편합니다. 한국 교회의 열의 아홉은 구원을 공짜라고 가르칩니다. 집에서 엄마 뺨을 때리고 교회 나와서 저는 부처님 싫어요. 예쑤 구원 믿쑵니다! 하면 천국에 가고, 민족을 위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다가 죽은 간디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라고 가르치지요. 이런 이분법은 얼핏 도덕적 직관으로 보기에도 대단히 엉성하고 불편한데, 구원을 인간의 작위적 노력의 축적으로 해석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 효과는 대단히 좋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사실 '값싼 구원'만을 판매하고 있는 교회가 많아진 것은 부작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파워풀 갓'을 외치며 박수를 치다가 집에 돌아온 아무개씨는 커피를 마시며 온라인 쇼핑몰에서 '성경 김'을 구매하면서 그 집의 비정규직 파출부 아줌마가 아니라 당근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목사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서약하면 그 순간부터 게임오버, 천국 열차 티켓 사전예약 VIP 좌석 확보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아무개씨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 아무개씨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면 그가 정말로 오만을 버리고 은총에 자신의 구원을 위탁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실천과 무위의 경계를 오히려 혼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인간이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를 벗고 자신의 구원을 은총에 맡겼다기보다는, 오히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그 행위의 성과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음악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더니 바이올린 없이 바이올린 연주가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기도는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상선에 오르는 선장이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이 운전대를 하나님 붙들어 달라고 청원하는 위선과 같습니다.
성서는 전능한 신이 선한 삶을 의무조건으로 걸고 인간과 계약한다고 말합니다. 선하게 살아라, 그럼 복을 주겠다. 계약 당사자 사이의 위계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신은 인간으로서 죽임을 당하는 일조차 각오합니다. 이것은 신이 1) 먼저 인간과 같이 아프고 약한 입장의 동일함을 위해 자기를 비천하게 하였으며(요일4:7), 2) 인간을 위해 선한 삶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고, 3) 그 모범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4) 이것을 널리 가르치고 보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침을 먼저 관찰하기를 원하고, 2) 그 욕망에 사랑이라는 사탕을 발라 판매하면서, 3) 이제는 실천이 없어도 마음이 중요하다는 불건전한 유심론을 입어, 4) 이 모든 것을 설파하는 데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고려할 뿐, 국지적이고 특수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개개인의 문제를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실천>에 노이로제를 보이는 분들, 계약과 실천적 측면에 대한 성서의 관점에 거부반응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성서에서 말하는 선한 삶에 관한 계약은 오늘날 월세방 계약처럼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계약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의 입장을 돌아보라고 요구하는 그 계약의무 이행은 과연 하나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봅시다. 엄마가 숙제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자녀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면서, 이것 먹으면 숙제 열심히 하라고 권유하며 새끼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에 비유해보면 어떨까요? 이 엄마의 계약은 불평등 계약입니다. 간식도 엄마가 하고, 숙제하면 엄마에게 좋을 것도 없는데 결국 아이들은 간식도 먹고 숙제도 하는 것이지요. 성서의 계약과 주문이 그러합니다. 전적으로 좋은 것만을 주기 위해 계약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은총이 발견되는 것이지, 계약 테이블에 앉지도 않고 숙제도 안하면서 빵만 먹고 도망가는 아들이 "엄마는 꼭 숙제 때문에 빵을 주시는 건 아니야. 숙제를 더 잘한다고 빵을 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그럼 또 숙제를 하고 당연히 빵을 요구하는 건 좋은 일일까요? 아닙니다. "숙제 다 했으니, 이제 빵 주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는 정 떨어지지요. 숙제와 빵을 동일시하여, 더 정교하고 많은 숙제로 빵에 도달하고자 한 태도 또한 성서는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요구되는 태도는, "엄마, 빵도 너무 맛있는데, 공부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저 다 감사해요." 라고 말하는 성실한 아이의 겸손함일 겁니다. 그 아이는 빵을 거저 주셔서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한 엄마의 깊은 뜻과 그 뜻을 위해 먼저 맛있는 빵을 마련해주는 당신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니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아이는 오히려 실천 없이 어떤 온전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성서가 보기에는 가장 악한 종류의 행위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입장을 더욱 어그러뜨리는 가치관 중 하나라는 것을 압니다.
동일한 입장을 취하시는 하나님 안에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은총이 있습니다.
(200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