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데모의 똘레랑스에 대하여
text / 2010/02/03 18:41
1. 씽크가 소개해 준 노이즈데모 영상이야. 홍대에서는 이 비슷한 걸 하려다가 차들이 빵빵거리고 싸움날뻔 한 적도 있다 하더라.
2. 트위터에서 만난 어떤 분이 프랑스에 지금 살고 있는데 말야. 프랑스인과 우리가 생각하는 관용이 좀 다른 걸까 의문을 제기했어. 이를테면 철도 파업으로 내가 지각하게 되어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 이건 똘레랑스에 의거해서 용인해야 하는 문제일까? 그에 따르면 프랑스인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그들은 다름을 방관하는 셈이지. 나는 이러이러하고, 너는 저러저러한 걸 나보고 어쩌란 거냐? 나는 철도노동자이고 너는 학생이다. 나는 내 밥벌이 때문에 여기에 있고, 열차를 끊은 건 내가 아닌데 왜 나한테 시비? 이런 말싸움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다르지 않음과 다름의 경계가 말장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지.
3. 또 하나의 장면. 사춘기 중학생이 있는 집 식구들과 밥을 먹는데 말이야. 내가 칼국수를 국자로 뜨고 있자, 어머님이 그 학생에게 왈, "이런 건 니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역시 손님에게 일 시키는 게 민망하셨던 게야. 그러나 이내 그 중학생의 충격발언.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일을 시키고 그래?"
4. 내 주장은 그래. 우리는 관용을 자본주의 사적재산에 기대어 사는 원자 개인의 물리적 반경 안으로 침입하지 않는 거라고 정의하지. 하지만 관용은 익숙한 것을 까발려서 그것의 불관용을 적발하는 active한 행위이지, 주어진 상황을 현상유지하면서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긍정하는 '배려'와는 다른 것이지. 우리는 어떤 불편은 태초에는 없었는데 외부로부터 추가로 생성되어 부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난 오늘 아침 잘 먹고 와서 예쁜 옷 입고 조용히 공부하려고 하는 착한 학생인데, 저 아저씨들 왜 자꾸 노래 불러서 날 방해해? 서로 좀 관용해주면 어디 덧나나? 짜증나~~~ 이렇게 말야. 하지만 말야, 아침에 니 똥꼬를 닦는 휴지부터 시작해서 모든 - 그래 모든! - 너의 편의는 타인의 불편함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이게 문명 사회의 방정식이지. 그래서 자유롭고 편안한 사적공간을 소유한 개인에게 어떤 정신적, 물리적 영향을 가하는 것은 침해행위이자 폭력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이러한 개입을 즉각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보면 웃기는 짓이지. 너 또한 숨만 쉬고 있어도 누군가의 텐트에 낙타처럼 침범하면서 살고 있다니까? 아프리카가 고향이 아니라면 여기에 반박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특히... 개인의 반경은 같지 않다는 걸 좀 기억해 줘. 나희덕의 시를 좋아하진 않지만, 사람들은 식당에서 욕망만큼 주문하는 게 아니라 "일용할 욕망"이 욕망하는 만큼 주문한다는 것. 다시 말해, 니가 공부하려고 하는 건 네 사회적 조건이 네게 허락한 욕망이고, 그 아저씨가 거기에 있는 건 먹고 살고자 하는 노동자의 욕망이며, 이 둘의 반경과 성격은 질적,양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지. 따라서 관용은 교회에 다니냐, 마음이 착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머니의 크기에 따라 규제된다. 이것은 앉은 자세가 똥이 마려우냐, 치질이 있느냐, 집에 비데가 있느냐에 따라 더욱 좌우되는 것이지 식사에 임하는 태도는 부차적인 것과 같다. 졸라 비루하고 싸구려틱한 마음가짐보다, 객관적이고 위장병을 유발하게 하는 가난의 조건이 중요하단 말씀.
그래서 세 장면에 대한 내 평은 이래.
답답하면 세상에 소리를 질러야 할 때가 있다. 아빠한테 일시키냐고 물어보는 애새끼 뒤통수는 후려치는 게 맛이고, 아빠가 철도운영 자동화로 직장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책상에 앉아 펜 굴리러 등교하면서 "아저씨 때문에 제가 지각하잖아요"라고 말하게 될지 생각해보자.
아니 그냥 내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