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철학 난제(패러독스) 여섯 개 해설

open.edu에서 공개한 강좌인데, 재미나서 대강 정리해보았습니다. 전공자가 아니고 영어도 잘 못 들었을 수도 있고 (추가. 이런 … 대본이 구글에 치니까 나오네요) .. 하여간 이상한 거 있으면 댓글로 얘기해주세요. 편의상 반말로 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그리스 철학자 제노에 따르면 거북이가 경주 시작할 때 약간만 아킬레스보다 앞선 위치에서 출발한다면 아킬레스는 절대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이기려면 먼저 시작 시점에 거북이가 앞선 거리를 따라잡아야 하는데 해당 지점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고, 그 시간 동안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전진하기 때문이다. 다시 아킬레스가 격차를 좁히기 위해 거북이가 있던 자리까지 이동하면 거북이는 다시 조금 앞으로 전진해있다. 이런 식이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르지 못하는 것.

이 패러독스에 따르면 물리적 운동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기 때문에 무언가 말장난이고 터무니없는 주장 같지만, 사실 이 주장 덕분에 우리가 애초에 물리적으로 유한한 거리를 운동하는 것이 무한히 작은 시간 단위에 걸쳐 이뤄지는 운동 행위의 총합이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즉 우리는 100미터를 20초에 달릴 때 1초X20개 단위의 운동을 단순히 더해서 그만큼 전진하는 게 아니라, 0.000000001초보다 더더더더 무한히 아무리 잘게 나누어도 다시 한 번 더 잘게 나눌 수 있는 어떤 무한히 작은 ‘끝없는’ 시간 단위에 조금씩 이동하여 그것들의 총합으로 총 거리를 이동한다. 무한히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0에 수렴한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듯, 이 무한히 작은 시간 단위는 무한히 잘게 쪼개면 결국 0에 수렴하며 결국 우리는 0에 수렴하는 시간단위 속에 운동을 성취한다. 세상이 그렇다. 100살을 살다 죽어도, 지구별의 나이에 비하면 그것은 그저 ’0′일 뿐인 거다. 결국 눈에 보이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이지만 모든 거리는 무한히 잘게 쪼개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이고, 그 무엇도 아닌 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불과한 어떤 움직임이 켜켜이 쌓여 우리는 달리기를 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0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는다. 무한급수에서 항의 수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은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리의 경주에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은 아니지만, 거북이를 따라잡은 모든 아킬레스는 출발 당시 거북이의 위치에 도달한다. 이 시작과 움직임의 행렬이 멈추는 순간 우주도 멈춘다. 공간은 한 번 더 쪼갤 수는 있지만 결국 유한한 100미터를 무한한 시간 속에 쪼갤 수는 없지 않나. 결국 그것은 어떤 길이이므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한다.

동영상에서는 무한등비급수가 현대 자본주의의 대출과 이자 계산에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ㅋㅋ 재밌다.. ㅋ 대표적인 게 모기지론인데, 사실 모기지론같은 담보대출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빌린 돈으로 또 남 빌려주고, 그걸 빌린 사람이 그 돈으로 다시 돈을 빌려 또 빌려주고 .. 이런 해괴망측한 구조다. 신용카드 돌려막기처럼, 사실 우리는 알고보면 다 거북이랑 경주하는 아킬레스 신세인 거지. 슈퍼 닌자 거북인 게 문제이지만 ;; 다들 코 앞에 있는 거북이 보고 달리지만, 평생 그 거리를 따라잡는 게 불가능한 인생들에게 은행과 보험회사는 일단 눈 앞의 거북이 출발선까지 도달하는 데 따르는 비용과 위험을 충당하거나 피하기 위해 대출을 해서라도 돈을 내라고 독촉한다.

할아버지 패러독스

시간 여행은 가능할까? 르네 바르자벨(Rene Barjavel)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평생 이 생각을 하고 앉아있었는데 ;; 1943년에 타임머신 타고 가서 할아버지를 내가 죽여버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할아버지를 내가 죽이면 아버지가 안 태어나고 그럼 내가 애초에 없는 거 아냐? 그럼 내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타임머신을 탈 수 있는 거지? … 그럼 내가 타임머신을 안 탔는데 할아버지는 누가 죽였지? 응???? 이게 뭐야 ㅋㅋㅋ

이게 멍청한 생각 같다면서 욕하면 안 되는 게… 애초에 시작을 타임머신부터 시작해서 선후관계를 단순히 특정하면 안 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랑 비슷해서 보는 시점과 관점에 따라 두 개의 사건이 물려돌아가니까 복잡해진다. 두 개의 사건은 서로에게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것.

영화 백투더퓨쳐(Back to the Future) 시리즈에서도 다뤄지는 이 주제는 오랫동안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이슈가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현재에 끼치는 이러한 영향 자체가 모순이므로 미래에서 온 사람은 없다.. 고 생각한 반면, 어떤 사람은 ‘평행 우주’를 말하면서 시간 여행은 여전히 가능한 개념이라고 반박.

평행우주 이론에 따르면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거의 어떤 시간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은 구별된 시간의 줄기를 생성하는 사건이라는 것. 미래에서 온 내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순간 우주는 할아버지가 죽은 이후의 역사와 할아버지가 살아있는 역사로 평행하게 구분 되어 병행하여 흐른다. ‘나’는 서로 다른 여러 개의 평행 우주 속에 여러 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백투더퓨쳐 방식이 더 잘 이해가 되서 그런지 아직도 타임머신 타고 가서 엄마랑 사귀는? 스토리는 여전히 단골 소재랄까. 게다가 이 패러독스를 통해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게 대단히 개념상 문제있다는 게 밝혀졌다고 해도, … 미래는 어때? 미래 여행은 될 수도 있는 거 아냐? (전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인 방

아이폰에 시리(Siri)는 정말 “지능”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존 설(John Searl)의 ‘중국인 방’ 논쟁은 대단히 유명한데, 그에 따르면 시리는 지능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시리가 멍청한 걸 증명해보자.

1980년에 심리철학자 존 설은 중국인 방 논증을 통해 ‘인공지능’ 개념에 문제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에 앉아있고 누가 창문 밖에서 중국어로 질문하면 거기다가 아이폰 대고는 시리가 하는 말 듣게 한 다음에, 시리가 대답하면 그걸 앵무새처럼 그대로 옮겨 창문 밖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창문 밖에 있는 사람은 집에 있는 사람이 발음이 너무 좋고 대답 내용도 적절하니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하지만 사실 집에 있는 그 사람, 중국어를 전혀 못한다. 단지 할 줄 아는 건 시리한테 물어보고 그대로 똑같이 발음 따라하는 흉내내기이지, 중국어 ‘이해’가 아니라는 거. 창문 밖에 있는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외출을 안 하지.. 라고 생각할 뿐, 중국어 실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음도 좋아, 묻는 말에 척척 대답도 잘 하고 친절하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다. 중국어를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제 방 안에 사람을 로보트로 교체하는 경우엔 어떤가? 아니면 아예 초강력 Siri만 벽에 붙어있으면 어때? 창문 밖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대답하는 게 사람인지 아이폰인지 알지 못할 거다. 행동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실제 의사소통이 발생했으므로, 질문한 창문 밖의 사람이 실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소통”을 체감했다면 그 소통을 수행한 게 사람이든 로보트이든 실제 ‘사고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완벽하지 않은가? (공학적으로는 이런 개념 정의가 편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 방’의 논증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아무리 어떤 로보트나 프로그램이 인간의 소통과 100% 똑같은 소통을 재현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해당 지식을 ‘이해한다’고 보기는 힘들며 다만 ‘흉내낸다(simulate)’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흉내와 이해는 다르다.

.. 근데 그럼 인간의 이해와 지성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단지 유전자와 뇌간의 신경작용에 의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남는다. 단지 복잡성의 차이만이 있는 건 아닌가하는.

힐버트 호텔

이것도 엄청 유명한 패러독스. 아인슈타인과 친구였던 독일 수학자 데이비드 힐버트의 작품인데, 전세계 호텔 직원의 적enemy이라고 해두자. ㅋㅋㅋ

무한한 수의 방이 있는 그랜드 호텔 건물이 하나 있고, 무한히 많은 손님이 방마다 투숙하고 있다. 무한히 무한히 많은 방이 있는 호텔이라니 감이 잘 안 오니까, 자 이 호텔에 누가 새로 투숙하려고 왔다고 한 번 가정해본다. 방이 무한하다는 건 그 손님을 한 명 더 받을 수 있다는 얘기. 어떻게? 그 손님을 1번 방에 집어 넣어. 그럼 1번 방에 있는 손님은? 2번 방으로 옮겨. 2번 방 사람은 3번 방으로 .. 자 이런 식으로 하면 1번 방 손님의 불만사항, 2번방 손님의 불만사항이 차례로 호텔에 접수되게 되고 이 불만사항은 100만년이 가도 끝이 없게 된다. 즉, 불만은 무한이 계속된다. 불만이 무한하다는 말은 안 끝난다는 말이고, 다시 말해 1번 방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자신의 방을 차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무한히 이어지는 수의 개념을 보증하는 것. 다시 한 명이 더 온다 한들, 불만사항을 접수하는 호텔의 수첩은 그 전과 동일하게 1번 방의 불만으로 시작하여 무한히 기록되므로 두 개의 수첩은 동일한 수첩이다. 단지 하루 늦게 시작하는 차이가 있을 뿐.

문제는, 이 호텔에 새로운 손님이 유한한 1명이 아니라, 무한히 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무한히 많은 손님을 태울 수 있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서 손님이 무한히 내린다. 아무리 호텔의 방이 무한하다고 해도, 결국 새로운 손님이 무한히 공급되므로 결국 호텔은 모든 손님을 수용할 수 없는 호텔이 되는 게 아닌가? 비록 방이 무한히 많기는 하지만 손님이 무한하면 더 이상 옮길 방이 없게 되는 거 아닌지?

아니 호텔 방 수가 무한한데 뭐 어때? 라고 답하는 대신에 힐버트는 무한히 많은 손님을 투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수학적으로 세련된 답을 준비했다. 호텔 사장님은 무한히 많은 손님을 태운 관광버스가 도착한 것을 보고 기존에 투숙했던 손님들 보고 옆 방으로 옮기는 대신 자신의 방 번호의 두 배에 해당하는 방으로 이동하도록 안내방송을 때린다. 즉, 1번 손님이 2번 방으로 가고, 2번이 3번으로 가도록 조치하는 맨 처음의 1차 명령에서는 명령 한 번에 호텔 전체에서 한 개의 빈 방이 새로 생기지만, 두 번째 방법에서는 단 한 번 명령에 따라 1번 방의 사람이 2번으로, 2번 방의 사람이 4번으로, 4번 방의 사람이 8번으로 … 가게 되면서 단 한 번의 조치로 등비수열에 따라 사람들이 투숙하게 되고 2, 4, 8, 16 … 그 사이에 1개, 3개, 7개 … 와 같이 홀수개 단위로 무한히 ‘늘어나는’ 빈 방이 만들어지게 된다. 즉 원래 어제 무한히 방이 많은 호텔에 오늘 한 번 마이크 잡고 방송하니 무한히 많은 방이 추가로 생겼다. 이제 무한히 많은 손님의 수용이 가능하다. (물론 처음에 100만 번째 방에 있던 사람은 방 옮기다가 죽겠네요 ;; )

힐버트의 패러독스는 많은 수학자와 물리학자, 철학자들을 매혹시켰고, 많은 이론가들도 즐겨 차용했다. 아마 그들 모두 호텔 아침 식사는 일찍일찍 일어나서 먹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을 .. ;; (언제 다 먹을까요..)

쌍둥이 패러독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물론 쌍둥이 동생이 없지만, 재밌는 생각을 했다. 자 여기 일란성 쌍둥이가 있다. 한 명은 ‘알’이라고 부르고, 한 명은 ‘버트’라고 부르자.

‘알’은 티비만 보는 녀석이고, ‘버트’는 여행을 좋아해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다. 우주선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날아간다.

바로 이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꺼내야 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우주를 더 빨리 날아갈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 따라서 이제 쌍둥이 형제 ‘알’의 관점에서 보면 ‘버트’의 시계는 자신의 시계보다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다.

평소 우리가 재밌는 탁구 치고 친구랑 놀면 막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 하잖아? 근데 반대로 시계 자체가 두 배 빠르고 모든 걸 2배속으로 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에 비해서 어떨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오래 탁구를 즐긴다. (아인슈타인은 천재임). 부산까지 걸어가는 사람보다 부산까지 KTX 타고 가는 사람은 더 빠른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부산까지 똑같이 100번 왕복했을 뿐인데 후자가 전자보다 덜 늙게 되는 것. 결국 시간은 상대적이다.

또 음.. 이건 마치 내 생각에 비디오테이프를 두 배 빠르게 재생해서 120분 분량을 60분 길이 테이프에 복사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60분 길이의 원래 빠르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120분 길이를 60분에 담아서 재생할 경우 사람들이 두 배 빠르게 움직이니까 정신이 없지만, 그 120분 분량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KTX 안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가 시속 400KM/h 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영화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두 배 빨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배경도 등속으로 빨라지기 때문에 … 영화 속 등장 인물들에게 시간은 동일하게 느껴진다. 단지 바깥에 있는 ‘알’의 관점에서만 120분 테이프 속의 ‘버트’가 대단히 고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며, 버트가 안에서 보는 시계와 알이 알의 집에서 보는 시계의 속도를 제 3자의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버트의 시계가 두 배 느리다. 버트는 마치 60분 테이프에 담긴 120분 분량의 영화처럼 빠른 비행선 안에서 바깥 세상보다 두 배 느리게 가는 시계를 보며 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두 배의 시간을 버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60분의 테이프에 120분의 영화를 담아서 테이프를 절약했듯이, ‘버트’는 두 배 빠른 열차에 앉아서 부산에 다녀온 사람과도 같고 60분 비디오의 분량이 흐르는 알의 시간 동안 두 배의 거리를 여행했으므로 알의 입장에서 버트는 마치 시계를 천천히 돌리는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 시대 사람에게 KTX는 마치 무릉도원에 다녀왔더니 아내와 자식들이 다 죽고 없었다는 전래동화와도 같은 것이다.

이제 ‘버트’가 집에 돌아와서 쌍둥이 형제 ‘알’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면 ‘알’은 ‘버트’보다 훨씬 늙어있게 된다. 부부동반으로 식사하면 상당히 어색해지는 거지.

잘 생각해보면 맞는 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이 난제는 …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 같고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는데,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끝까지 파고들었고 이것이 실제로 사실임이 밝혀졌다.

‘시간 팽창’ 또는 ‘알’의 관찰 시점에서 ‘버트’의 노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이 현상은 사실 오늘날 GPS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내비게이션이 “2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다 아인슈타인 덕분이라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사실 고양이보다는 개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여자를 그렇게 밝혔다는데 ;;)

1920년대에 물리학자들은 양자 역학이라는 걸 발견해냈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어떤 입자들은 너무너무너무 작아서 크기를 재려고 하는 순간 이미 측정하는 행위의 영향을 받아 변하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 너무 작은 벌레가 있어서 이걸 내가 잡았는데 죽은 걸 잡았는지 내가 잡아서 죽었는지 모르는 그런 거? 벌레가 애초에 살아있었는지 죽어있었는지 보려면 잡아서 관찰을 해야 하는데, 잡는 행위 자체가 벌레의 생사와 관계가 있으니 관찰하고 싶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 따라서 벌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확률로만 계산할 수 있고.. 예를 들면 벌레가 죽을 확률이 40%인 손가락 힘으로 수 천 번을 잡았는데 벌레가 몇 % 살아있었으니, 그럼 잡기 전에 벌레 상태는 아마도 .. 등등등..

그런데 이 이론의 문제점은, 잡기 전에 잡으려고 하는 대상이 어떤 ‘중첩(super-position)’의 상태에 있다는 걸 가정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엄청 작은 어떤 입자가 내가 잡기 전에는 A,B 두 상태로 존재하다가 잡는 순간 둘 중 하나로 나타난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석 복권을 긁기 전에 긁는 면 뒤에 답이 공장에서 애초에 찍혀 나온 게 아니라, 내가 긁기 전에는 복권은 당첨과 꽝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가, 오직 내가 긁는 순간에 둘 중의 하나로 세상에 나타날 뿐이다.. 뭐 이런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벌레는 관측하기 전에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가능한 모든 상태에 걸쳐서, ‘중첩되어’ 존재한다. 아니 어떻게 벌레 한 마리가 죽었으면서 살아있는 모든 상태를 지니고 있을 수 있는가? 아무리 벌레가 작다고, 너무 작아서 관찰하는 순간 그 상태에 영향을 주므로, 원래의 상태가 확률의 문제가 되므로, 관찰 전에 그 벌레의 상태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라니.

슈뢰딩거는 열받아서 이 벌레를 고양이로 뻥튀기해서 양자역학을 까기로 한다. 고양이가 상자 안에 있다. 상자 안에 독약이 든 병이 있고 병에 망치가 연결되어 있다. 망치는 자동으로 작동되는데 1시간에 50%의 확률로 방사능을 내뿜는 입자를 가이거 계수기가 감지하면 작동되게 되어있다.

만약 1시간 후에 방사능 물질이 나왔다면(확률50%), 감지기가 감지를 했을 것이고, 그럼 망치가 병을 깼을 것이고, 그럼 고양이는 빠이빠이 저 세상 갔을 거다.

그런데 만약 어떤 동일한 입자가 방사능 붕괴를 하는 상태도 가능하고 안 한 상태도 가능한 두 개의 상태를 가질 수 있다면, 고양이 또한 죽었으면서 죽지 않은 두 개의 상태를 가지는 게 가능하다. 물론 상자를 열기 전까지. 마치 달을 관찰하기 전까지는 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가 관찰하는 순간 있는 상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물론 실제로 고양이가 죽었으면서 안 죽게… 두 상태가 중첩되게 만들 수는 없다. 동물단체가 들고 일어나겠지… 하지만 아주아주 작은 원자 같은 건, 동시에 ‘두 상태’에 있는 게 가능해보인다는 게 그들의 주장인데, 슈뢰딩거의 깊은 빡침을 알 수 있는 비유이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더 자주 인용되는..)

고양이는 안 되는 게 아주 작은 세상에선 가능하다? 양자역학은 우리의 세계 인식에 엄청난 도전을 준다. 세상은 관찰자의 관찰 행위로 인해 존재가 영향받는 세상이라는 주장. 심지어 관찰하는 순간 관찰을 안 했으면 어찌되었을 우주와 관찰하는 순간 관찰자인 나의 행위를 포함하는 우주로 나뉘어서 평행하게 수 맣은 우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 물리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자를 열기 전에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상자를 열기 전까지 상자 안에 있는 고양이는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중첩으로 존재하는 걸 이해하는 건 아직도 무리수. 현재는 고양이처럼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서로 이미 관찰자의 위치에서 어떤 상태를 결정하게 되므로 고양이 같은 큰 녀석이 ‘중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고.

누가 좀.. 이것들 보충 설명 좀 해주세요 ;; ㅠㅠ

(2013년 10월에 쓰고, 2014년 12월에 조금 수정)

  • sticky

    드디어 워드프레스로 넘어오셨군요. 감축드리옵니다~

    • 헤헤 환영해주셔서 감사해요!

    • seoulrain

      떠났던 집에 돌아온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