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노트 3-2. 적정노출에 대하여

사진 전문가의 강의가 아닙니다. 사진을 찍으며 드는 생각을 하나씩 정리한 노트입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의 사진 노트를 엿본다고 생각해주세요. – 서울비

오늘은 ‘적정노출’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화가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얼굴이 하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담고 있기 쉽다. 그림의 시간은 인간이 판단하는 가치에 따라 생겨난다. 사진에선 시간이 균일하다. 어떤 부분이건 균일한 시간 동안 균일한 화학 처리를 받는다. 노출되는 시간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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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판단과 결정들은 체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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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그림과 달리 언어를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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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글에서 “… 사진은 …정보경제학의 결정적인 돌연변이에 해당한다”라고 썼다. 독자적인 언어를 갖지 않으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곧 돌연변이인 것이다.
– 존 버거/장 모르, <말하기의 다른 방법>, 눈빛, 93-94쪽

그림은 생각하고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것이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아요.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보게 될 영상을 상상한 뒤에 눈을 “하나, 둘, 셋!” 하고 떠보세요. 사진은 그렇게, 단번에, 하나의 장면으로, 별안간 다가오는 것입니다.


△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1889년


△ 요세프 카쉬 작. [헬렌 켈러]. 1948년

요즘은 화학적으로 필름을 처리하는 대신 센서로 들어오는 ‘빛 정보’로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디카’ 시대입니다만, 카메라에 HDR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차적으로 센서에 들어오는 원본 영상 자체는 전체가 같은 노출시간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친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 내 맘대로 더 밝게 찍을 수도 있고 더 어둡게 찍을 수도 있고, 왜 이렇게 찍었는지 물으면 ‘나의 예술적 표현 의도가 있어!’라고 대답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거의 동 시간대의 빛을 단 한 번에 모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2초, 3초의 장노출 사진이라고 하더라도 샐로판지처럼 같은 층위에 있는 빛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지 중요한 순서나 그리고 싶은 순서대로 빛을 ‘읽어내려가면서’ 모으지는 않는다는 거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따라서 노출의 기본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찰~~~’에서 시작한 빛의 열차에서, 여러분이 무언가를 보았을 때 여행을 멈추고 정거장에서 내려서, ‘~~~~칵’ 하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내리면 여러분이 노출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풍경은 저 멀리 어둠에 가려져 만나보지도 못하게 될 것이고, 너무 늦으면 하얗게 빛바랜 기억으로 사라져 잊히게 되지요.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진의 노출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둥근 물체의 그림자는 둥글게, 부드러운 커튼을 통과한 빛줄기는 벽면에 부드러운 파도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진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처음부터 너무 고흐처럼 밤하늘이 찬란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심술내지 말고,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물이 나에게 말하는 순간을 기다려보세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낄 때 셔터를 누릅니다. 그 사진의 밝기와 그 사진 곳곳에 담긴 빛의 명암은 이상하게도 오늘 나에게 주는 느낌이 다르고, 일 년 후에 나에게 주는 느낌이 또 다르지요. 빛은 이렇게, 의도하지 않아도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계속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계산하지 마라

그림으로는 밝은 창가에서 방 안쪽으로 나를 보는 아이의 웃는 모습을 공들여 그릴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이 극명한 밝기 차이를 나중에 포토샵으로 합성하면 모를까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어두운 아이의 미소를 밝게 하면 창가의 빛은 지나치게 밝아져서 눈부시게 되며, 창가의 빛을 줄이면 아이의 미소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죠.

오늘도 우리는 너무나 아까운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감춰서 포기하면서, 대신 더욱 필요하고 놓칠 수 없는 무언가를 노출해 사진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도 그래요. 다들 눈이 예뻐서 주변의 것들은 죄다 칙칙해지는 그런 예쁜 사람 한 명을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단 한 번 ‘찰칵’했을 뿐인데, 눈에는 선택적으로 곳곳이 도드라져 나에게 말 거는 사진의 매력.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돌연변이라고 이름 지은 건 정말 적절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본은 그렇습니다. 받아들여라, 그게 사진이다. 너무 계산하지 마라. 언어가 없어도 사진은 스스로 말할 것이다.

△ 마이클 케냐, 영국 요크셔 지방, 1986년

△ 백조 반영, 영국, 1977년

적정 노출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사진을 보며 “너무 어둡게 나왔네.”, “너무 밝게 나왔네.”라고 말하지요. 이때 밝다, 어둡다는 보통은 원래 눈으로 봤던 것보다 밝거나 어둡다, 또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다, 어둡다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적정 노출’(optimum exposure), 최적의 노출에 대해서 노출이 과다한 것은 사진의 밝은 부분의 정보를 잃은 것이고, 노출이 부족한 것은 사진의 어두운 부분의 정보를 잃은 것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쉽게 말해 사진에 하얗게 떠버린 곳이 많으면 ‘노출 오버’(overexposure)라고 하고, 어두운 부분이 뭉쳐있으면 ‘노출 언더’(underexposur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카메라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진가도 가능하면 하얗게 뜨거나 어둡게 뭉친 사진을 피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눈으로 본 어떤 빛을 고이 담아서 사진에 다 담아 넣고 싶어 하지요. 내 눈으로 봤는데 사진에 안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나 어떤 사진가들은 일부러 ‘노출 오버’ 또는 ‘노출 언더’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즉, ‘적정 노출’에서는 벗어나 있어도, 그 사진에 빛 정보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진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거죠.

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은 노출

무엇을 보았나요? 밝은 낮에 뭔가 종말을 느꼈다면, 카메라를 이용해서 밤처럼 어둡게 찍을 수도 있습니다. 찍힌 사진에 내가 본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 그것이 좋은 노출이고, 꼭 카메라가 계산해 준 적정 노출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이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찍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시각 감각으로 무엇이 느껴지는지 매달려보고, 사진에 담아보려고 해야 한다는 말이겠죠.

△ 라즐로 모홀리 나기, [라디오 송신탑에서 본 풍경], 1928년

유명 사진가이자 프린팅의 대가였던 앤셀 애덤스(Ansel Adams, 1902-1984)는 위대한 사진가들의 작품을 합동으로 전시하는 사진전에서 라즐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 1895 ~ 1946)가 찍은 사진이 너무 조악해서 빼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기야 필름 원판을 빌려와서 세계 최고의 프린팅 전문가의 솜씨로 사진의 밝기와 질감을 조절해서 다시 인화했는데……

인화하자마자 자신이 인화한 걸 버리고 원래의 사진을 전시하기로 했다죠. 질감과 적정 노출을 맞춘 순간 원래의 사진이 가진 독특한 조형미와 추상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학적 노출 계산이 만능이 아니라는 소리죠.

사진이 하나의 순수한 행위-자국으로 여겨지는 것은 …… 소위 노출의 유일한 순간 동안이다. 그 순간에, 바로 그 유일한 순간에 인간은 그 무엇도 중재할 수 없으며, 사진의 본질적인 특성을 바꾸려는 그 어떠한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그 순간에는 틈새, 코드들의 망각된 순간, 거의 순수한 인덱스가 있다.
– 필립 뒤봐, [사진적 행위], 사진 마실, 66쪽

카메라로 사진의 노출값을 설정하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조리개 8에 두고, 조리개 우선 모드로 막 찍는 겁니다. 사진의 순수한 순간을 만나게 될 때, 노출에 대해 어느 날 우리는 득도해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

재미없는 얘기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편하게 사진 구경 좀 해보려고 합니다. 사진가들이 빛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2012년 6월 처음 작성했고, 2014년 4월 슬로우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블로그에 다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