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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돼지와 소크라테스 중 소크라테스가 낫다. vs. 먹고 죽은 귀신이 땟깔도 좋다.
자유인가 생(生)인가?
나는 당연히 자유를 택하겠다.
#2 (오늘 목사님의 설교 + . . . )
예수가 떡을 들고 축복한 뒤, 떡을 나눈다.
만약 우리가 이 사건을 떡을 복제하는 마술이 아니라, 부족한 떡으로도 나누고자 하는 예수의 감사와 그 실천, 공동식사commensality의 정신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오병이어가 마술 없이도 왜 기적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떡을 오천 개로 불리지 않은 채 예수가 그것을 나누었다면, 우리 또한 오늘 나의 가진 것을 더욱 결여하게 하여 부족으로써 감사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이다. 꼬뮨주의자들도 그랬다던데, 예수 또한 부족한 것을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다. 부족할 때 오히려 더욱 부족해지기를 원하고, 부족하지 않다고 말하기로 결심하면서 결여를 결여하기로 믿는 믿음, 그것이 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이다.
#3
사랑도 그렇다. 자꾸 미안하고 아프기만 하면, 너무 아프기만 하면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아파도 부족해도 , 앞으로 더욱 아프고 더욱 부족해지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더욱 감사하고 나의 불안을 덜게 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사랑이 아니겠나
#4
그러나 자유 또한 생리적, 사회적, 구조적, 역사적 조건에 기반한다는 말도 맞다.
생리적으로는, "진정 먹히고자 하는 신경적, 뇌심리학적 사고체계를 부여받은 돼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돼지를 먹는 것은 보통 돼지를 먹는 것보다 훨씬 윤리적일까? ..글쎄.. "고통을 전혀 인지하지 않는 닭을 만들어서 잡아먹는 것"은 더욱 윤리적인가? 정말..? 배고프다는 감각적이고 객관적인 경험과 상관 없이 배고프다는 인식만 조작하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이런식의 관념론은 참으로 못났다.
신앙공동체가 <자유>라고 말하는 것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에 이런 "죽고 싶어 안달난 돼지" 이야기에 버금가는 노력들이 있었다. 즉, 자유를 어떤 인식과 개념적 차원에서만 정의한 뒤 그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가끔 민중이 똥이 마렵고, 배가 고프고, 정치적 분열을 겪는 가운데에 선포된 기독교의 자유는 먹고 죽은 귀신보다 더 꼴불견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제기되었듯이, 가끔 인간은 너무나 약해서 자유를 버리고 울면서 막걸리와 빵을 찾는 것이다. 이 비열하고 가련한 인간의 알콜중독과 탐닉을 애달파하지 않으면서 선포되는 모든 자유는 인텔리의 망상이자 비과학적 상상이다.
#5
따라서 이전 노예의 삶을 버리고 자유인으로 살 것.
그러나 어떤 면에서 자유인을 버리고 노예를 선택할 자유도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본 뒤 그렇게 하기. 자유는 취사선택의 문제 이상이며, 몸부림이다.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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