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서 1st - [디지털 기독교강요1]
●9월의 독서 1st - [디지털 기독교강요1]
+ 지은이 : 김준수
+ 제목 : 『디지털 기독교강요 :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하나님)』
+ 출판사 : 규장
+ 발행연도 : 2001
+ 동기 : 전도사님 추천
+ 내용 : 종교개혁의 텍스트북인 <기독교 강요>. 초판은 1536년 4월, 칼빈의 나이 불과 26세에 스위스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 총 6장으로 구성된 휴대용 크기의 이 교리문답서는 나오자마다 유럽을 발칵 뒤집었으며, 칼빈은 이로소 종교개혁의 챔피언이 되었다. 기독교 강요는 단순한 신학논문이 아니다. 경건의 개요이다. 클래식을 현대 버전으로 말끔히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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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건과 종교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습니다. 나무도 심지 않고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 참경건이 없는 곳에는 참종교도 없고, 참종교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경건은 참종교를 낳고 참종교는 하나님을 아는 참지식을 낳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경건이야말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지요.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딤후 3:12)고 명령하기도 하셨지요. (pp.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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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웬지 칼빈이 싫다. 오히려 인간성의 양극으로 치닫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동정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인간의 순종의 돌판을 가슴에 안고 병석에서도 끝내 경건을 추구했다는 칼빈에게는 거부감이 든다.
이런 종류의 기분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느끼는 부담스러움과 별반 다름 없다는 생각도 한다. 모인 사람의 숫자도 몇 안되고 다들 숭고한 진리의 말씀보다는 다급한 문제의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기도 모임에서 혼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는 왕따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슴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불타고 타인을 향한 기독교적 희생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소통의 코드를 버렸다는 점에서 - 내 생각으로는 - 하나도 기독교적이 아니고 사랑을 전이시키지 못했다. 칼빈은 이런 종류의 반발(?)을 예상했던 것일까 ... 종교성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뿌리는 선천적이니까 일단 그 선은 인정하고 대화에 참예하라고 촉구하는데 ... 나는 그 부분이 어째서 관용이라고 불리우는지 모르겠다. '싫으면 지옥불에나 떨어져라!'
두번째 생각은 결벽성에 관한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경건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결벽증과 혼동이 될 때가 더러 있다. 그 사람들은 칼빈의 말을 빌어 이 세상은 계시이고 성경은 해설책이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유효한 주장을 하지만 정작 성경이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게 너와 나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것을 잊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인간적인 것을 경멸하는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악한 범주'에는 삶을 나름대로 숙명적인 것으로 긍정하면서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가난한 쾌락까지 넣어버린다.
칼빈은 성화를 금지했다지. 그의 경건을 향한 해박하고 순수한 정열을 존경하지만 .. 가끔은 오늘 사회에 무관심한 교회의 모습이 칼빈 시대에 몽둥이를 들고 교회권력에 침입해서 아름다운 성화를 모조리 깨부순 극렬한 결벽증과 겹쳐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는 바르게 말했고 참다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허전하다. 난 정말 경건한 사람들을 째려보며 독설할 위인도 아니지만 .. 못내 맘으로나마 섭섭하다.
* SERV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4-24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