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관찰기-07. 회장선거, 수능, 바람직


△ 친구랑, 2015년 11월

학생회장 공약

고등학생 때 누가 회장 선거에 나왔었고 누가 당선되었던지, 내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곧 우리 학교 아이들도 선거운동에 들어가는데, 애들이 보고용으로 드미는 계획이 조밀조밀하지 못한 거야 이해하지만 계획이 가리키고 이루고자 하는 바는 조금 유감스럽다. 아마도 성인들의 국회의원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데, 특히 공약들의 문장 어미를 보면, ‘무엇무엇을 구입하겠다, 업체를 알아보고 무엇무엇을 해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수입해서 무엇무엇을 …’ 등등으로 끝나는 폼새가 영 개운치 않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내 고등학교 시절과 크게 공약이 달라지지 않은 것이 과연 아이들 탓인지 의심이 드는데, 이런 문장들을 보게 되는 게 꼭 애들이 어른들 무작정 따라해서 그렇다거나 출마자의 미숙이나 부도덕과 관계된다기보다는 미성년이 지닌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그런 듯 하다. 가령 학교에 얼마의 돈이 있고 얼마의 돈을 당선 후 사용할 수 있는지, 운영위원회에 가다듬어 계획을 잘 제출했더니 학교 예산을 통해 새로운 사업이 착수되었다든지.. 등등과 같은 실제로 어떤 보이는 힘을 가지고 쿵쿵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Body’를 운영해볼 기회와 그것을 실패할 경험을 얻을 수 없는 구조가 보이는 거다. 정말로 학교와 친구들을 움직여보도록, 그리고 반성해보도록, 그리고 민주적으로 평가받아 욕도 얻어먹도록 어른들은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아이들이 적어오는 계획이란 결국 좁은 방에서 맨손체조 정도의 자유를 갖으면서, 그나마 임원 피선출의 경험이란 생활기록부에 인성에 관한 모종의 면죄부와 비슷한 스펙처럼 들리기도 한다.

수능 소감

고사장 이름을 착각하고 옆 학교에 있다가 시험 시작 10분 전에 저어 멀리서 뛰어오는 어떤 여자 애를 보았다. 아마 그 속도로 어디 대회에 출전했으면, "자네 운동 해보지 않겠나?"라는 말을 들었을 거다. 수능이란, 그토록 숨이 차는 경험이 아닌가.

바람직한 학생

학교 앞 모 회사에 입사 면접 시험 보러 왔다가 학교 생각났다면서 졸업생이 들렸다. 질문 뭐 나왔냐고 물으니 "00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 같은 걸 물었다던데, 생각해보면 나도 작년에 면접관으로 어디 들어가서 조그만 애한테 그런 걸 물었었네. "바람직한 00의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놈의 자질. 하나마나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직능은 물론이고 십대에게 물어보기에는 벅차면서 우악스러운 질문이 아닌가? 무슨 플라스틱 주물 형성 하는 것 마냥 최종 상태의 품질과 (구입하는 사람이 보기에) 우아한 양태를 강제하는 문장이다. 정말 사악한 말이 아닌가? 최근에 파리에서 권총을 들고 "신을 믿는가?"라고 물었던 태도와 어쩌면 닮았다.

나는 교육이 크게 모델과 모델링을 양산하고 전제하는 것과, 다발적이고 우연한 계기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경우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텔레비전 브라운관 컨베이어 벨트에서 똑같은 제품을 불량 없이 대량 생산하던 시기에 어울린다. 후자는 어떤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2015년 11월)

학교관찰기-06. 수능, 소수자, 낙태, 귀여니


△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 전문가에요", 2015년 11월

수능 전날

담임 선생님과 으쌰으쌰 힘내자고 종례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또 교무실로 내려오는 아이들이 있다. 발길 향하는 걸 보고 있으면 중요 과목순이 아니라 그래도 나를 위로해준 적이 있던 선생님, 내 이름은 챙겨서 불러주던 선생님한테 총총 모여들어, "쌤 기를 받으러 왔습니다." "쌤 저 내일 잘 다녀올게요." 별 내용도 없는 인사를 건네고는 쑥스럽게 퇴청하는 풍경이다. 섬처럼 군데군데 자신의 구루를 찾아 나름의 의식과 주문을 외우는 듯한 풍경 속에, 교무실 한 켠에 여자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시험을 망친 게 아니라 시험을 치러 가기 전에 미리 남은 울음을 모두 쏟아내고 싶었던 걸까, 뺨도 코도 빨간 아이가 푹 안겨진 품에서 나와서 흔한 고맙다는 말도, 잘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큰 여자는 계속 등을 도닥이는데 내 코도 시큰한 향이 올라오더라.

소수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 중에 "인권 변호사", "인권 단체"에 들어가고 싶다는 애들이 있다. 정밀한 정의는 못할지라도 나는 일단 아이들이 "사람이라면 응당 괴롭히지 말고 박탈하지 말고 지켜줘야 하는 그 무엇"에 대한 도덕 감각을 늘 주제 삼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고는 한다. 아이들의 인권은 무엇인가?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또래 집단이나 친구 고리를 벗어난 타인에게 가차없이 무너지는 신념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주 그것은 최소한의 기만이 없다면 어른들이 두려워하는 많은 제한사항을 가볍게 뛰어넘어 선사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어른들은 생각이 어리고 미성숙한 살이의 전형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교실에서 친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손잡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거나, 더럽고 하기 싫은 일 앞에서 ‘제가 할게요!’라고 손 드는 아이들을 숱하게 만나왔으며, 그래서 아이들은 인권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잘 배운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음은 내가 이 학교에서 어른(교사)들에게 지난 주에 들은 말들이다.

성소수자 문제가 인권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동성애는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그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애들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잖아요.
소수자라는 말이 공격을 피하려고 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쓰는 말이라던데요.

낙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국에서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을 데려다가 단체봉사활동을 돌려주는 모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가 무엇일까? 애들이랑 이번에도 전교생을 데리고 봉사활동에 투입시키면서 입에 텁텁한 기분만 남는 하루를 보냈다.

우선, 이런 방식의 규모로 실행되는 새마을 봉사활동은 이제 지양되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하루 있다가 돌아갈 아이들과 그 어떤 의미와 유대를 형성하고 싶은, 또는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아이들은 커다란 복지시설이 어떤 규모의 사람들을 수용하여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많은 양파와 많은 기저귀와 많은 걸레로 하루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과, 김장을 하기 위해 4천 포기의 배추가 필요하다는 스펙터클 외에 얻는 게 없다. 그런 장엄함은 아이맥스 영화관처럼 서울의 중심가에서도 흔히 보던 ‘구조’인데.

두 번째로, 종교시설의 설립취지나 운영 기조에 대한 교육을 지자체 차원에서 좀 배제해라. 그 기관에서는 10대 학생들에게 수년 째 낙태 비디오를 틀어주는데 집게로 태아를 꺼내는 장면이나 심지어 부서진 손과 발까지 그 어떤 모자이크나 여과 없이 시전하면서 "우리 나라가 자살율이 높은 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십대들도 병원 가서 이런 식으로 낙태한다."는 메시지를 일방 주입한다. 단지 종교 관련 시설이라고 해서 청소년에게 공공 상영하는 것이 위법해보이는 영상을 연간 수 천 명의 학생들에게 틀어주며 선정적으로 낙태 반대론을 펼치는 걸 행정기관은 아는지 궁금하다.

상식, 그리고 일베충

국정화 교과서 관련 몇 명의 학생들이 꿈틀꿈틀 거렸는데, 열이 난 학생회장은 무언가 크게 해보려다가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 같아요"라며 돌아갔고, 아침에 학교 밖에서 일인 시위를 하다가 출근한 그 교사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과 자신의 머리 속에 든 것 사이에 분열을 관찰하고는 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쪽팔린다."

어떤 아이는 앞뒤가 잘 맞지 않지만, 성긴 어휘로 자보 비슷한 것을 붙였는데,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아닌 거 같다"는 반대 의견에 금세 아이들이 달라붙어 "너 일베충이지"를 시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양쪽 아이를 달래며 서로 혐오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보았지만, 기분은 계속 우울했다. 편가르기와 혐오를 차단하는 것이 정치적 의견보다 먼저라는 교사들의 이야기에 아이들의 열은 다행히(?) 좀 진정되었지만, 거꾸로 보면 과연 무엇이 혐오할만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빼앗으면서 늘 하던대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들 자리에 다시 앉아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오십 분에 하루를 시작하며, 거울을 보며 말한다. "그래, 내일모레가 수능인데."

귀여니

영어 수업을 하다가 언어 사용 습관이 정치나 경제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일상의 언어 사용 습관을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언어 전체의 활용과 규칙이 더욱 건전해질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읽었는데, 말 나온 김에 귀여니에 관한 경험을 애들에게 물었더니 애들이 꺄륵꺄륵 웃으면서 다들 할 얘기가 많더라는.

근데 우리반 친구가 한 번 읽어보라며 귀여니 책을 한 권 빌려주었다.

어제 경원이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머리에 나사가 풀린 듯 실실 웃어대는 거지? ㅇ_ㅇ
"아싸~~! 빠리ㅂㅏㄱㅔ뜨ㄲㅓㄷㅏ!"
– 귀여니, [그놈은 멋있었다], 반디, 2006년, 170쪽.

결론적으로 다시 보니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 내가 교실에서 듣는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를 잘 보여주는 기호 활용이라고 생각이 들며, 소설적으로 또는 작가의 의도대로 말하는 어떤 소녀를 등장시킨 숱한 성장소설들보다 오히려 바로바로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키보드로 타이핑되어 각인된 글자들이 꽤 매력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ㅋㅋㅋ

이른바 ‘리터러시’에 대한 어른들의 우려란, 귀여니 이후에 우리가 진정 붕괴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책상 정리에 관한 엄마들의 불안 정도로 생각해도 괜찮지 않나 한다. 누구나 닥친 문제에 대한 최소한 독해력을 생존의 기술로서 지니게 되어 있다. 교사는 따라서 언어 습관의 교정보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사실은 너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충분히 서술할 용기와 관찰과 관심에 관해 학생에게 물어야 하며, 진정 관심있는 대상이 생길 때 아이들의 어휘는 그 어떤 형태로든 날카롭고 정교해지기 마련이다. 그 날카로운 결과물이 기성 문법인지 아닌지는 언어의 발달을 규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언어가 그것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2015년 11월)

학교관찰기-05. 공포, 일처리, 수시철


△ 교실에서 주운 풍선, 2014년 10월

공포

선배 교사 한 분이 출근 후 학교 건물 지하 주차장 본인의 차 안에서 그만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렸다. 뒤이어 출근한 교사들은 그 앞과 뒤와 옆으로 차례차례 무거운 금속기계를 놓고 황급히 교실로 오른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서운하고 무서운 마음을 말할 때 공감이 되었다. 넓고 깊게 사람을 보아야 하는 교사들의 주변 시야가 시계공보다 좁다.

그는 사실 시험 감독 중에 한 번 더 쓰러진다. 교실에서. 이번에는 노출되었고, 껍데기 안에 가려 있던 것도 아닌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괜찮으냐고 묻는 사람이 없다. 부축하는 아이도 없다. 그리고 교무실로 나중에 걸려온 전화. "우리 아이가 쿵 하는 소리에 시험을 망친 거 같은데, 뭐 담당 선생님께서 이 점 잘 처리해주시겠죠."

둘 중에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직장에서의 비명횡사는 근무환경과 복지의 문제이겠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아이들의 시험 시간은 목숨보다 서러운 기억이 될 것 같다.

일처리

어느 나라 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 협상하고, 설문 돌리고, 파업하는 걸 배운다던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 현장 중심에 있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일처리’라고 하겠다. 일처리란, 분란 없이 신속함을 말한다.

"여하튼 되었다"라든가, "된 모양새"를 중요시하는 이 시선이 대부분의 학교 일과를 기획한다. 행동주의가 원투쓰리 펀치를 얻어맞은 게 언제인데 우리는 보여줄 성과를 생산하거나, 결국 어떻게 보일 것인가, 또는 보여지는 것을 어떤 보이는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에 하루를 다 쓴다. 애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으면 배우지 않았고 성취한 게 없으니 하나도 처리된 게 없다고 일러두고, 중앙시스템에서 번호별로 아이들을 정렬하여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옆 자리 선생님에게, "이제 몇 명 남으셨어요?"라고 묻는 게 우리가 아이들을 일감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이른바 난장의 흔적은 고대의 유물인양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어린 사람은 실패해도 된다던가? 정기적으로 우리는 누가 실패했는지를 종이에 정리하여 배부하곤 한다.

연구원에서 전화가 왔다. "갑작스럽게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에 연구원들 회의하는 데 오셔서 성취평가제 관련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무례한 연구원 박사님들에게, 도대체 여러분이나 저나 왜 이렇게 일처리를 못하는 동시에 잘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귀하는 "이 수업을 듣고 전문적인 내용의 담화를 읽고 저자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다." 따위의 성취목표에 어쩌다가 집착하게 된 건지 묻고 싶다. 성취하고 싶냐고 당사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는 그 목표들을 말이지.

수시철

가장 따뜻하기도 하고 춥기도 하다는 계절, 수시철이 지나가고 있다. 발표가 나는 날은 함부로 질문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웃어서도 안 되며, 또한 혼자 울 수 있는 장소를 잘 모색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경쟁이란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 때 생긴다. 턱 괴지 말고 자지 말고 정신 차리고 노력하라는 주문하는 선생님도 계시고, 웅크리지 말고 가오(?)는 잃지 말고 너만의 인생을 살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다. 시장의 생리를 무시하고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교사도, 열패감에 빠진 애한테 세상이 만만하고 동등한 가치들이 전시된 슈퍼마켓이라 노력만 하면 골라서 성취하는 판매대인 것처럼 말하는 어른도 재수없기는 매한가지더라 만은, 어른들이 뭐라 하든 결국 그저 이 수시철에 떨어지는 건 낙엽이 아니고 그저 애들의 눈물이 아닌지.

가끔 교무실에 합격 인사로 먹을 걸 사들고 와서 편지랑 내미는 학생들도 예쁘고, 불합격했지만 "괜찮습니다. 선생님도 저 상담해주시고 추천서 챙겨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놀라운 학생들은 더욱 예쁘다. 그러나, 가끔이라도 내 자리로 놀러 오던 아이 중에 수시철 찬바람 지나고 나자 스스로 자격이라도 박탈된 것처럼 소식 없는 얼굴들은 얼마나 슬픈가.

(2015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