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 Filename TV 사용기 -도망쳐, 알고리듬으로부터

Default Filename TV ( http://defaultfile.name/ )는 유튜브에 카메라 파일명 그대로 올라온 영상만 골라서 랜덤으로 추천해주는 사이트입니다.

유튜브에 영상을 가끔 올리고 있고, 현재 유튜브 프리미엄 서비스 가입자이긴 한데, 검색과 시청기록을 중지 상태로 설정하고 사용합니다. 유튜브가 너무 지저분하게 추천하는 영상들 보기 싫어서 그런 건데 … 첫 화면은 보시다시피 매우 혼란하네요.

△ 유튜브 첫화면. 혼란하다…

유튜브가 나에게 맞추는 걸까, 내가 유튜브에게 맞추는 걸까?

사실 … 충격적이라고 하길래, 웃기다고 하길래, 너무 멋있는 장면이 있길래 아무 영상이나 클릭한 적 있으시잖아요..? 자초한 측면이 있지만 .. 그래도 아래 목록이 낯선 건 어쩔 수 없습니다.

  1. 지구가 반으로 두 동강? 충격의 고전게임 속 배드 엔딩
  2. 막례가 방탄소년단 아이돌 뮤비를 봤을 때
  3. 조선 시대 백정의 비밀
  4. 예삐 공주 이용진, 남심 홀리는 저격 멘트
  5. 알프스 4K 드론 + 아이폰X 로 찍은 영상
  6. 직좌 신호 받아 교차로 진입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이 교통사고 영상
  7. 채널 추천 : 야식이의 대왕 홍게 라면 18분 안에 다 먹기, 즉석 햄버거 많이 시켜서 사장님한테 혼났습니다

에.. 코빅 영상은 옛날에 아이폰으로 퇴근하다가 본 거 같고 … 막례 할머니는 왜 … 게임은 하지도 않는데 왜…. 나는 차도 없는데 한문철 티비는 왜 … 알프스 좋아하긴 하지만 왜 … 라면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왜 저렇게 큰 라면을 다 먹는 홍게 라면 먹방은 왜 ….. 도대체 왜 .. 라는 생각만 듭니다.

그럼 더 정확한 추천을 위해 다시 검색기록을 공개해야 하는 걸까요? 근데 그 출발점이 홍게 라면이라면? 모두가 홍게 라면에서 시작하는 거라면? 우연한 만남을 가로막고, 클릭 효율이 높은 영상을 연속 재생하려고 하는 이 첫화면이 점점 지겨워지네요.

Default Filename TV – 있는 그대로 올린 영상을 우연히 만난다

최근에 fivethirtyeight.com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이트 하나를 소개합니다. Default Filename TV라는 곳이에요.

기사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만, 이 사이트의 매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추천 알고리듬을 배제한다

유튜브가 그 어떤 것도 추천하지 않으므로, 그놈의 먹방, 어벤져스 해설 영상들, 새로나온 아이폰 개봉 영상, 사건사고 영상과 작별합니다.

검색되어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 영상이 진짜다

페이스북 사진에 친구를 태깅하면 누가 편해지고 누가 이익인 걸까요? 내가 친절하게 검색엔진 최적화해서 쓰는 글은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규칙을 지키는 걸까요? 이름 그대로 촬영한 기기에 저장된 파일명 그대로 올린 영상이야말로 함부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박막례와 MVI 0927.mp4는 비교되지 않으니까요. 분류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정보라도 추가하는 순간, 알고리듬의 점수 매기기는 시작되니까요.

다음에 볼 영상을 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기사에서도 언급이 됩니다만, 저도 Stumble Upon 을 꽤 즐겨 봤었습니다. 인터넷에 뭐가 제일 인기있고, 뭘 먼저 보는 게 뉴스를 놓치지 않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 막 생겨나던 때에 번창했던 사업 모델로, 이른바 “다음에 읽을 것”, “다음에 볼 것”을 추천하는 서비스였죠.

Default Filename TV의 다음 영상은 우연에 기댑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게도, 유튜브가 나의 클릭과 시청 행동에 근거해서 추천하던 다음 영상보다는 Default Filename TV 가 우연히 물어다주는 “another video”가 훨씬 저에게 큰 기쁨을 주더군요. 게다가 더욱 맥락에 닿아 있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Default Filename TV – 귀신처럼 당신을 기억해 따라가지 않는다

유튜브에서 “상대성 이론”을 한 번 찾아보고 싶었을 뿐인데 .. 그 이후로 제가 과학 영상에 빠지길 바라는지 계속 과학 관련 영상을 연이어 추천하더군요. 용산에 갔다가 심심해서 “얼마에요?” 질문 한 번 했더니 계속 귀찮게 따라오던 상인이 생각납니다. Default Filename TV에서 만나는 영상은 그냥 우연히 거기에 있고,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파일이름 그대로’가 의미하는 것

fivethirtyeight.com 기사를 쓴 Gus Wezerek은 Default Filename TV 제작자 Pipkin의 기획이 왜 훌륭한지 잘 설명합니다. 화면이 나를 찾아와서 나를 겨냥해 퍼포먼스를 보이는 관계인가, 아니면 화면이 객체이고 나는 그것을 보는 주체이며 언제든 그만 보기를 선택할 수 있는가? 화면은 굳이 나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가지고 나에게 오는가, 아니면 우연히 우리가 만나게 되는가?

Pipkin의 프레이밍이 (비슷한 사이트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 ‘조회수 0’인 영상은 쉬는 시간에 같이 놀 친구 한 명 없는 아이처럼 슬프다. API 요청을 조작해 원래 그대로의 파일명으로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찾아내면 주체-객체 관계가 이동한다. 그 영상을 업로드한 사람들은 바이럴을 의도하고 올린 게 아니었다. 당신은 원하면 영상을 보면 된다. 하지만 TikTok처럼은 아니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찍지 않는다.

Default Filename TV 에서 만난 순간들

아래는 제가 며칠 동안 Default Filename TV 에서 만난 장면들입니다. 태국의 어떤 단체 직원들이 동물 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또다른 어떤 곳에서는 아기들이 팬케잌을 만들어요. 영상 속에서 그 누구도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상 속에서 티비 컨텐츠를 해설하거나, 인싸들이 가는 맛집에 나도 가봤다고 말하거나, 꿀팁을 주겠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컨텐츠라면 제목을 바꿨겠지요). 콜라에 멘토스를 집어넣거나, 골목식당 돈까스 집을 리뷰는 대신 스스로에게는 가장 소중했던 순간들, 맥락이 없으면 왜 재밌는지 충분히 모를 그런 장면들을 그냥 공개해두었을 뿐입니다. 저는 여기 서울에서 그들이야말로 내일 별일 없는 일상을 보내기를 희망합니다. 유튜브에는 상담가들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짝 보여주는 일상이 가장 위로가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고딕체로 미리보기 화면을 채워 클릭을 유도하는 수많은 언박싱과 멘토와 구루들과 크리에이터들을 조심하세요. 왜냐하면 좋아요와 구독자가 없어도 이미 괜찮을 수 있어야, 앞으로도 쭉~ 당신의 인생이 괜찮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에요. 좋아요와 구독자가 있어야 감사한 어떤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들은 당신이 소비자이기 때문에 들려주는 것이지 당신을 걱정해서 들려주는 말이 아닙니다.

△ 태국의 어떤 지방의 단체 행사
△ 누나의 팬케이크 요리 시범
△ 수업시간. 인간은 도체다.
△ 대본 연습
△ 인도 어린이들의 공연

(2019년 5월)

2 thoughts on “Default Filename TV 사용기 -도망쳐, 알고리듬으로부터”

  1. 소개해 주신 글 보고 저도 한번 봤는데, 나름 흥겨운 대신 조금 조심할 부분도 있겠더라고요. 저는 갑자기 어떤 여성이 옷을 벗는 영상이 나오기도 하고, 말을 고기로 해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해서… 이게 지역별 문화 차이일수도 있겠다 생각하지만, 아무튼 걸러지지 않는 부분이기에 …

    1. 전 아직 그런 영상은 만나지 못했지만 “파일명 그대로”라는 장치 뿐이라 사이트에서도 스크리닝 없으니 주의하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어디 행사장에서 사이트 소개하면서 시연하다가 낭패볼 수도 있겠더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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