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관찰기-07. 회장선거, 수능, 바람직


△ 친구랑, 2015년 11월

학생회장 공약

고등학생 때 누가 회장 선거에 나왔었고 누가 당선되었던지, 내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곧 우리 학교 아이들도 선거운동에 들어가는데, 애들이 보고용으로 드미는 계획이 조밀조밀하지 못한 거야 이해하지만 계획이 가리키고 이루고자 하는 바는 조금 유감스럽다. 아마도 성인들의 국회의원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데, 특히 공약들의 문장 어미를 보면, ‘무엇무엇을 구입하겠다, 업체를 알아보고 무엇무엇을 해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수입해서 무엇무엇을 …’ 등등으로 끝나는 폼새가 영 개운치 않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내 고등학교 시절과 크게 공약이 달라지지 않은 것이 과연 아이들 탓인지 의심이 드는데, 이런 문장들을 보게 되는 게 꼭 애들이 어른들 무작정 따라해서 그렇다거나 출마자의 미숙이나 부도덕과 관계된다기보다는 미성년이 지닌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그런 듯 하다. 가령 학교에 얼마의 돈이 있고 얼마의 돈을 당선 후 사용할 수 있는지, 운영위원회에 가다듬어 계획을 잘 제출했더니 학교 예산을 통해 새로운 사업이 착수되었다든지.. 등등과 같은 실제로 어떤 보이는 힘을 가지고 쿵쿵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Body’를 운영해볼 기회와 그것을 실패할 경험을 얻을 수 없는 구조가 보이는 거다. 정말로 학교와 친구들을 움직여보도록, 그리고 반성해보도록, 그리고 민주적으로 평가받아 욕도 얻어먹도록 어른들은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아이들이 적어오는 계획이란 결국 좁은 방에서 맨손체조 정도의 자유를 갖으면서, 그나마 임원 피선출의 경험이란 생활기록부에 인성에 관한 모종의 면죄부와 비슷한 스펙처럼 들리기도 한다.

수능 소감

고사장 이름을 착각하고 옆 학교에 있다가 시험 시작 10분 전에 저어 멀리서 뛰어오는 어떤 여자 애를 보았다. 아마 그 속도로 어디 대회에 출전했으면, "자네 운동 해보지 않겠나?"라는 말을 들었을 거다. 수능이란, 그토록 숨이 차는 경험이 아닌가.

바람직한 학생

학교 앞 모 회사에 입사 면접 시험 보러 왔다가 학교 생각났다면서 졸업생이 들렸다. 질문 뭐 나왔냐고 물으니 "00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 같은 걸 물었다던데, 생각해보면 나도 작년에 면접관으로 어디 들어가서 조그만 애한테 그런 걸 물었었네. "바람직한 00의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놈의 자질. 하나마나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직능은 물론이고 십대에게 물어보기에는 벅차면서 우악스러운 질문이 아닌가? 무슨 플라스틱 주물 형성 하는 것 마냥 최종 상태의 품질과 (구입하는 사람이 보기에) 우아한 양태를 강제하는 문장이다. 정말 사악한 말이 아닌가? 최근에 파리에서 권총을 들고 "신을 믿는가?"라고 물었던 태도와 어쩌면 닮았다.

나는 교육이 크게 모델과 모델링을 양산하고 전제하는 것과, 다발적이고 우연한 계기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경우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텔레비전 브라운관 컨베이어 벨트에서 똑같은 제품을 불량 없이 대량 생산하던 시기에 어울린다. 후자는 어떤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2015년 11월)

학교관찰기-06. 수능, 소수자, 낙태, 귀여니


△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 전문가에요", 2015년 11월

수능 전날

담임 선생님과 으쌰으쌰 힘내자고 종례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또 교무실로 내려오는 아이들이 있다. 발길 향하는 걸 보고 있으면 중요 과목순이 아니라 그래도 나를 위로해준 적이 있던 선생님, 내 이름은 챙겨서 불러주던 선생님한테 총총 모여들어, "쌤 기를 받으러 왔습니다." "쌤 저 내일 잘 다녀올게요." 별 내용도 없는 인사를 건네고는 쑥스럽게 퇴청하는 풍경이다. 섬처럼 군데군데 자신의 구루를 찾아 나름의 의식과 주문을 외우는 듯한 풍경 속에, 교무실 한 켠에 여자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시험을 망친 게 아니라 시험을 치러 가기 전에 미리 남은 울음을 모두 쏟아내고 싶었던 걸까, 뺨도 코도 빨간 아이가 푹 안겨진 품에서 나와서 흔한 고맙다는 말도, 잘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큰 여자는 계속 등을 도닥이는데 내 코도 시큰한 향이 올라오더라.

소수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 중에 "인권 변호사", "인권 단체"에 들어가고 싶다는 애들이 있다. 정밀한 정의는 못할지라도 나는 일단 아이들이 "사람이라면 응당 괴롭히지 말고 박탈하지 말고 지켜줘야 하는 그 무엇"에 대한 도덕 감각을 늘 주제 삼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고는 한다. 아이들의 인권은 무엇인가?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또래 집단이나 친구 고리를 벗어난 타인에게 가차없이 무너지는 신념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주 그것은 최소한의 기만이 없다면 어른들이 두려워하는 많은 제한사항을 가볍게 뛰어넘어 선사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어른들은 생각이 어리고 미성숙한 살이의 전형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교실에서 친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손잡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거나, 더럽고 하기 싫은 일 앞에서 ‘제가 할게요!’라고 손 드는 아이들을 숱하게 만나왔으며, 그래서 아이들은 인권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잘 배운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음은 내가 이 학교에서 어른(교사)들에게 지난 주에 들은 말들이다.

성소수자 문제가 인권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동성애는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그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애들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잖아요.
소수자라는 말이 공격을 피하려고 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쓰는 말이라던데요.

낙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국에서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을 데려다가 단체봉사활동을 돌려주는 모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한 이유가 무엇일까? 애들이랑 이번에도 전교생을 데리고 봉사활동에 투입시키면서 입에 텁텁한 기분만 남는 하루를 보냈다.

우선, 이런 방식의 규모로 실행되는 새마을 봉사활동은 이제 지양되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하루 있다가 돌아갈 아이들과 그 어떤 의미와 유대를 형성하고 싶은, 또는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 아이들은 커다란 복지시설이 어떤 규모의 사람들을 수용하여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많은 양파와 많은 기저귀와 많은 걸레로 하루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과, 김장을 하기 위해 4천 포기의 배추가 필요하다는 스펙터클 외에 얻는 게 없다. 그런 장엄함은 아이맥스 영화관처럼 서울의 중심가에서도 흔히 보던 ‘구조’인데.

두 번째로, 종교시설의 설립취지나 운영 기조에 대한 교육을 지자체 차원에서 좀 배제해라. 그 기관에서는 10대 학생들에게 수년 째 낙태 비디오를 틀어주는데 집게로 태아를 꺼내는 장면이나 심지어 부서진 손과 발까지 그 어떤 모자이크나 여과 없이 시전하면서 "우리 나라가 자살율이 높은 건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십대들도 병원 가서 이런 식으로 낙태한다."는 메시지를 일방 주입한다. 단지 종교 관련 시설이라고 해서 청소년에게 공공 상영하는 것이 위법해보이는 영상을 연간 수 천 명의 학생들에게 틀어주며 선정적으로 낙태 반대론을 펼치는 걸 행정기관은 아는지 궁금하다.

상식, 그리고 일베충

국정화 교과서 관련 몇 명의 학생들이 꿈틀꿈틀 거렸는데, 열이 난 학생회장은 무언가 크게 해보려다가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거 같아요"라며 돌아갔고, 아침에 학교 밖에서 일인 시위를 하다가 출근한 그 교사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과 자신의 머리 속에 든 것 사이에 분열을 관찰하고는 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쪽팔린다."

어떤 아이는 앞뒤가 잘 맞지 않지만, 성긴 어휘로 자보 비슷한 것을 붙였는데, "그래도 이런 방식은 아닌 거 같다"는 반대 의견에 금세 아이들이 달라붙어 "너 일베충이지"를 시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양쪽 아이를 달래며 서로 혐오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보았지만, 기분은 계속 우울했다. 편가르기와 혐오를 차단하는 것이 정치적 의견보다 먼저라는 교사들의 이야기에 아이들의 열은 다행히(?) 좀 진정되었지만, 거꾸로 보면 과연 무엇이 혐오할만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빼앗으면서 늘 하던대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들 자리에 다시 앉아 다음날 아침 일곱 시 오십 분에 하루를 시작하며, 거울을 보며 말한다. "그래, 내일모레가 수능인데."

귀여니

영어 수업을 하다가 언어 사용 습관이 정치나 경제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만, 일상의 언어 사용 습관을 건강하게 하는 것으로 언어 전체의 활용과 규칙이 더욱 건전해질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을 읽었는데, 말 나온 김에 귀여니에 관한 경험을 애들에게 물었더니 애들이 꺄륵꺄륵 웃으면서 다들 할 얘기가 많더라는.

근데 우리반 친구가 한 번 읽어보라며 귀여니 책을 한 권 빌려주었다.

어제 경원이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머리에 나사가 풀린 듯 실실 웃어대는 거지? ㅇ_ㅇ
"아싸~~! 빠리ㅂㅏㄱㅔ뜨ㄲㅓㄷㅏ!"
– 귀여니, [그놈은 멋있었다], 반디, 2006년, 170쪽.

결론적으로 다시 보니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 내가 교실에서 듣는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를 잘 보여주는 기호 활용이라고 생각이 들며, 소설적으로 또는 작가의 의도대로 말하는 어떤 소녀를 등장시킨 숱한 성장소설들보다 오히려 바로바로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키보드로 타이핑되어 각인된 글자들이 꽤 매력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ㅋㅋㅋ

이른바 ‘리터러시’에 대한 어른들의 우려란, 귀여니 이후에 우리가 진정 붕괴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책상 정리에 관한 엄마들의 불안 정도로 생각해도 괜찮지 않나 한다. 누구나 닥친 문제에 대한 최소한 독해력을 생존의 기술로서 지니게 되어 있다. 교사는 따라서 언어 습관의 교정보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사실은 너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충분히 서술할 용기와 관찰과 관심에 관해 학생에게 물어야 하며, 진정 관심있는 대상이 생길 때 아이들의 어휘는 그 어떤 형태로든 날카롭고 정교해지기 마련이다. 그 날카로운 결과물이 기성 문법인지 아닌지는 언어의 발달을 규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언어가 그것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2015년 11월)

학교관찰기-05. 공포, 일처리, 수시철


△ 교실에서 주운 풍선, 2014년 10월

공포

선배 교사 한 분이 출근 후 학교 건물 지하 주차장 본인의 차 안에서 그만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렸다. 뒤이어 출근한 교사들은 그 앞과 뒤와 옆으로 차례차례 무거운 금속기계를 놓고 황급히 교실로 오른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서운하고 무서운 마음을 말할 때 공감이 되었다. 넓고 깊게 사람을 보아야 하는 교사들의 주변 시야가 시계공보다 좁다.

그는 사실 시험 감독 중에 한 번 더 쓰러진다. 교실에서. 이번에는 노출되었고, 껍데기 안에 가려 있던 것도 아닌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괜찮으냐고 묻는 사람이 없다. 부축하는 아이도 없다. 그리고 교무실로 나중에 걸려온 전화. "우리 아이가 쿵 하는 소리에 시험을 망친 거 같은데, 뭐 담당 선생님께서 이 점 잘 처리해주시겠죠."

둘 중에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직장에서의 비명횡사는 근무환경과 복지의 문제이겠지만, 일어나지 않았던 아이들의 시험 시간은 목숨보다 서러운 기억이 될 것 같다.

일처리

어느 나라 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체 협상하고, 설문 돌리고, 파업하는 걸 배운다던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 현장 중심에 있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일처리’라고 하겠다. 일처리란, 분란 없이 신속함을 말한다.

"여하튼 되었다"라든가, "된 모양새"를 중요시하는 이 시선이 대부분의 학교 일과를 기획한다. 행동주의가 원투쓰리 펀치를 얻어맞은 게 언제인데 우리는 보여줄 성과를 생산하거나, 결국 어떻게 보일 것인가, 또는 보여지는 것을 어떤 보이는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에 하루를 다 쓴다. 애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으면 배우지 않았고 성취한 게 없으니 하나도 처리된 게 없다고 일러두고, 중앙시스템에서 번호별로 아이들을 정렬하여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옆 자리 선생님에게, "이제 몇 명 남으셨어요?"라고 묻는 게 우리가 아이들을 일감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이른바 난장의 흔적은 고대의 유물인양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어린 사람은 실패해도 된다던가? 정기적으로 우리는 누가 실패했는지를 종이에 정리하여 배부하곤 한다.

연구원에서 전화가 왔다. "갑작스럽게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에 연구원들 회의하는 데 오셔서 성취평가제 관련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무례한 연구원 박사님들에게, 도대체 여러분이나 저나 왜 이렇게 일처리를 못하는 동시에 잘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귀하는 "이 수업을 듣고 전문적인 내용의 담화를 읽고 저자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다." 따위의 성취목표에 어쩌다가 집착하게 된 건지 묻고 싶다. 성취하고 싶냐고 당사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는 그 목표들을 말이지.

수시철

가장 따뜻하기도 하고 춥기도 하다는 계절, 수시철이 지나가고 있다. 발표가 나는 날은 함부로 질문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웃어서도 안 되며, 또한 혼자 울 수 있는 장소를 잘 모색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경쟁이란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 때 생긴다. 턱 괴지 말고 자지 말고 정신 차리고 노력하라는 주문하는 선생님도 계시고, 웅크리지 말고 가오(?)는 잃지 말고 너만의 인생을 살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있다. 시장의 생리를 무시하고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교사도, 열패감에 빠진 애한테 세상이 만만하고 동등한 가치들이 전시된 슈퍼마켓이라 노력만 하면 골라서 성취하는 판매대인 것처럼 말하는 어른도 재수없기는 매한가지더라 만은, 어른들이 뭐라 하든 결국 그저 이 수시철에 떨어지는 건 낙엽이 아니고 그저 애들의 눈물이 아닌지.

가끔 교무실에 합격 인사로 먹을 걸 사들고 와서 편지랑 내미는 학생들도 예쁘고, 불합격했지만 "괜찮습니다. 선생님도 저 상담해주시고 추천서 챙겨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놀라운 학생들은 더욱 예쁘다. 그러나, 가끔이라도 내 자리로 놀러 오던 아이 중에 수시철 찬바람 지나고 나자 스스로 자격이라도 박탈된 것처럼 소식 없는 얼굴들은 얼마나 슬픈가.

(2015년 11월)

학교관찰기-04. 최일구와 실패 선생

모든 것이 귀찮아진 어느 오후
티켓을 산다 0시발 태양로케트
멀어지는 지구의 모습 보며
다가오는 태양의 불꽃 보며
모든 것을 생각한다
아 ~ 아 ~ 아 ~ 아 ~

중2병 향기가 듬뿍 풍겨오는 이 노래를 다들 정신없이 박수를 치며 부릅니다. 정확히 10분 전에 "MBC 전 앵커 최일구 언론인을 소개합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라고 사회자 마이크에 대고 말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다들 지금 왜들 이러는 걸까요? 갑자기 모두 70년대 학교 다닌 동기동창이지 싶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진로탐색 꿀팁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개드립치러 온 사람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쌍수’를 해서 얼굴이 예뻐졌다", "김정은 개객기", "’로케트를 녹여라’로 가수의 꿈을 이루었다", "당산철교 건널 때 부실공사 보도한 내 덕분에 살아있는 줄 알아라", 정말로 ‘개드립’은 무한정 염가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했어요. 아이들이 웃겼다고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꽤 유익했다고 평가했던 이 날의 기억,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거죠. 그야말로 무엇을 이루기 위한 꿀팁이라든가 ‘정신차리고 공부해’ 류의 ‘뽕’이 없어도 유익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은 가능하냐는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적어보았습니다.

실패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배운다

최일구 전 앵커는 어떤 기준에서 직장에서 파업이란 과정을 통해 복직에 실패하였고, 최근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 신청하는 등 실패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죠. 학생들은 파업하다가 직장 짤리고, 돈도 없는 이 아저씨를 보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을까요?

오히려 실패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과 마주하는 장면은 꽤 괜찮은 질문을 만들어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 "진짜 언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과 같은 질문은 어떤 사람이 실패를 자처할 때, 그리고 그 댓가로 꽤나 버거운 짐을 짊어지는 도중에 – 그러니까 아직 그 짐을 홀연히 벗지 못하고 있는 정황에서 아직도 그 선택이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적 가치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거나, 성취한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서 더욱 자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던가요? 근사한 것을 성취 완료했거나, 차마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정신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말을 모두 믿어주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어떤 언론인이 부당한 정황에 항의하다가 실직하여 애들 앞에 와서 로케트를 녹이며 춤을 출 때, 애들은 연민이 아니라 용기와 정직을 보았던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미성년이야말로 마음껏 실패할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라면, 아직 실패를 벗어날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엉덩이춤을 멈추지 않고 자존감 충만한 사람들을, 그 실패의 와중에 많이 초청했으면 좋겠어요. 그들로부터 배울 게 많을 것입니다.

유머 있는 사람에게 배운다

현재 중고등학교의 직업탐방 또는 진로탐색 프로그램은 겉으로는 개인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적합한 진로를 설정하고 그에 맞게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와 만남의 기회를 학교가 제공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학교가 적극적으로 이끌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보다는, "당장 다음 달에 누구 와줄 사람 없나?"라는 질문에 가로막혀 전화 돌리느라 바쁜 상황이 연출됩니다. 사람 구하기 힘들어요. 이 가운데 욕 안 먹으면서 아이들도 시시해하지 않을 사람을 데려와야 할 텐데 검증할 시간은 없으니 특정 직업군이나 직능, 직함을 앞세워 사람을 찾게 되는 거죠. 담당자는 죽을 맛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진로를 직업이나 직능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면 "선생님이 될 것인가, 기업인이 될 것인가"와 같은 단편적 질문만이 남는데 그 해악은 단지 선호 직업군의 사람 모시기 쉽지 않다는 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청년기에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직업을 취사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많던가요? 오히려 우리 대다수는 "니가 싫어하는 일 A와, B 가운데 뭘 할래? (비정규직이나 무급 인턴으로)"와 같은 질문을 먼저 받을 거에요.

선택 기회가 무한하지 않은데 무슨 과에 진학할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로탐색 프로그램이 체계적일수록 덜 유용해지는 면이 생기죠. 자세하고 분화되었으며 보다 개인적인 정보를 맞추어 제공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왜 넌 안 되는지 깨닫게 해주는 수많은 자아 각성, 청춘 프로젝트, 부흥회의 사례가 양산됩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단지 그 자리에 있을 때만 모두들 로또를 꿈꾸느라 기분이 좋을 뿐이에요. 저는 CGV 효과라고 부릅니다. ㅋ

차라리 이 시간에 유머를 가르치는 건 어떤가요? 어떤 선생의 말마따나 ‘존나 버티는 정신’이 필요한 시점인 거죠. 현실에서 해학을 발견하고, 일상을 뒤틀어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 별 해괴한 것들을 실험하고 시도하면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예술세계가 왜 매력적인지 20살 이전에 배우지 못한다면 평생 모를 겁니다. 성공을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 말고, 성공 조까라 그래 내가 제일 멋있어 정신의 어떤 사례집 발간이 필요합니다.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것이 자아성취와 동의어라고 생각하면 최일구는 벌써 분열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최일구 아저씨는 당산 철교가 멀쩡한 게 자신 덕분이고, 로케트를 녹이는 게 더 근사한 자아실현이라고 설파하십니다. (아멘). 그것은 불의한 세상에 고꾸라져버린 후에 정신분열해서 얻은 해괴한 취미생활 같은 건 아니고, 오히려 로케트 엔진처럼 뜨거운 자기애에 가까웠어요. 어쩌다가 파산했지만, 푼돈에도 괜찮다며 기꺼이 학교에 찾아와 썰을 풀어주시는 걸 보니 그게 계획하는 제 2의 인생이 저는 근사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질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MBC 아나운서가 되나요?"

"MBC랑 대한항공이랑 먹고 살려고 시험 봤는데, MBC에 붙으면 됩니다."

아아, 종이 쪼가리에 영어단어시험문제나 날리는 이 정규직 파리 한 마리가 범접할 수 없는 광할함 아닙니까? 진로를 탐색한다는 것은 이렇게 반드시 직업이라는 키워드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순서가 끝나자 소리를 지르며 아저씨랑 사진 찍으러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 "최일구 강연자와 함께" 2015년 5월

가도가도 끝없는 태양처럼 / 인생길은 누구나 험난하지 / 쉬운 일은 없는 거야
아…아…아…아… / 끝없는 우주 한 구석에 / 한줌도 안 되는 흙덩어리 위에서
왜 인간은 등지며 사는가 / 웃으며 살자

  • 최일구 작사/작곡, "로케트를 녹여라" 중에서.

(2015년 6월)

학교관찰기-03. 해바라기 소녀들


△ 아이들이 심었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4월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정원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들도 놀러오고, 예쁜 꽃들도 많고, 잔디도 싱그럽게 깔려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정비’하여 다시 ‘설치’하려고 착공하기 전의 모습이 가끔 그리워요. 좀 더 흙이 드러나있었고, 가지치기가 덜 된 은행나무가 청소를 힘들게 했죠. 수풀이 이발소 못 간 머리카락처럼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자라나서 그 뒤에 앉아 속닥거리는 여자애들을 잘 감춰주었습니다. 소리와 냄새와 온도가 오래도록 켜켜이 섞이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웃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영화관람이 오락이라면 아마 그 때 숲에 앉아 친구랑 앉아있는 시간을 휴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4월을 앞두고 그 정원에서 놀던 해바라기 소녀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애들은 선생님 몰래 해바라기를 교정에 심어버렸어요. 200개 이상의 씨가 여기저기에 도포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고생들이 참 예쁘고 낭만적이어서 예쁜 꽃을 보고 싶어서 심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틀렸습니다. 사실 그녀들은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간식이 필요하여 해바라기 씨를 자급하자는 학급회의 의결에 따랐을 뿐이었죠. 여고생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겠으나, 일단 그들이 이 지구의 먹을 것을 해치워버리기 위해 지구에 온 게 분명합니다.

어쨌든, 그녀들의 도전을 전해듣고 이 해바라기가 꽃피기를 그날부터 응원했지요. 시련은 있었어요. 학교 전면으로 들어오는 길에 심었던 녀석들은 결국 정원사 아저씨에 의해 제거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저씨가 심어놓은 특제 장미 사이에 올라오는 새싹은 그저 잡초처럼 보였거든요. 아이들이 졸라댔지만 이미 정원에 적합한 수목을 선정하여 치밀하게 배치한 정원사 아저씨 입장에서도 줄 맞춰서 심어놓은 장미 사이에 정배열을 어그러뜨리며 해바라기가 올라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드셨을 거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결국 해바라기 새싹 몇 개는 잘 보이지 않는 터에서 올라와 꽃을 피웠습니다. 빨리 건물로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구석에서 말이에요. 꽃피운 해바라기는 당당했습니다. 미치도록 빨갛고 짙은 정원사 아저씨의 장미와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장미는 환경에 적합하고, 병충해에 강하며, 꽃이 피면 오래가는 품종을 선별하여 구입한 뒤에 비닐하우스에서 비료를 듬뿍 먹고 소중하게 육성된 뒤에 꽃 피기 직전에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학교 초입에 ‘상장’되는 것었다면, 아아, 저는 그 해바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단지 좀 먹어보자는 더욱 원초적 이유로 뿌려졌으며, 아무도 그것이 더 예뻐야 한다거나 도태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그치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비닐하우스의 형성평가를 통과한 후 출하하는 과정 대신 스스로 비를 먹고 바람을 맞아 성장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안 하면 인생이 쫑난다는 리스크에 대비하려고 열심히 수업 들으며 아마 가끔 창밖을 보았겠지요. 흙에서 스스로 그 다음의 목적 없이, 이를테면 자라나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봄이 되었기에 자라나서 결국 쑥쑥 올라와 꽃잎을 품는 해바라기를 내려다보았던 것이겠죠.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미친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온실에서 옮겨 심어져도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자란 줄 알고, 해바라기는 처음부터 열심히 자랐는데 천천히 관찰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올해 봄이 찾아오는 교정을 보며 스쳐갔던 1년생 해바라기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너른 휴식의 공간에 스스로 자라나는 공간도 그립습니다. 정원은 3개월만에 성계를 키워내는 닭공장과는 달라야 할텐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햇살을 보았죠.
그리고 노란 머리를 흔들며,
이웃에게 속삭였습니다.
"겨울은 죽었다."
– A. A. Milne, "Daffodowndilly", [When We Were Very Young]

(201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