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관찰기-03. 해바라기 소녀들


△ 아이들이 심었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4월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정원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들도 놀러오고, 예쁜 꽃들도 많고, 잔디도 싱그럽게 깔려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정원을 ‘정비’하여 다시 ‘설치’하려고 착공하기 전의 모습이 가끔 그리워요. 좀 더 흙이 드러나있었고, 가지치기가 덜 된 은행나무가 청소를 힘들게 했죠. 수풀이 이발소 못 간 머리카락처럼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자라나서 그 뒤에 앉아 속닥거리는 여자애들을 잘 감춰주었습니다. 소리와 냄새와 온도가 오래도록 켜켜이 섞이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웃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영화관람이 오락이라면 아마 그 때 숲에 앉아 친구랑 앉아있는 시간을 휴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4월을 앞두고 그 정원에서 놀던 해바라기 소녀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애들은 선생님 몰래 해바라기를 교정에 심어버렸어요. 200개 이상의 씨가 여기저기에 도포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고생들이 참 예쁘고 낭만적이어서 예쁜 꽃을 보고 싶어서 심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틀렸습니다. 사실 그녀들은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간식이 필요하여 해바라기 씨를 자급하자는 학급회의 의결에 따랐을 뿐이었죠. 여고생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겠으나, 일단 그들이 이 지구의 먹을 것을 해치워버리기 위해 지구에 온 게 분명합니다.

어쨌든, 그녀들의 도전을 전해듣고 이 해바라기가 꽃피기를 그날부터 응원했지요. 시련은 있었어요. 학교 전면으로 들어오는 길에 심었던 녀석들은 결국 정원사 아저씨에 의해 제거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저씨가 심어놓은 특제 장미 사이에 올라오는 새싹은 그저 잡초처럼 보였거든요. 아이들이 졸라댔지만 이미 정원에 적합한 수목을 선정하여 치밀하게 배치한 정원사 아저씨 입장에서도 줄 맞춰서 심어놓은 장미 사이에 정배열을 어그러뜨리며 해바라기가 올라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드셨을 거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결국 해바라기 새싹 몇 개는 잘 보이지 않는 터에서 올라와 꽃을 피웠습니다. 빨리 건물로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구석에서 말이에요. 꽃피운 해바라기는 당당했습니다. 미치도록 빨갛고 짙은 정원사 아저씨의 장미와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장미는 환경에 적합하고, 병충해에 강하며, 꽃이 피면 오래가는 품종을 선별하여 구입한 뒤에 비닐하우스에서 비료를 듬뿍 먹고 소중하게 육성된 뒤에 꽃 피기 직전에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학교 초입에 ‘상장’되는 것었다면, 아아, 저는 그 해바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단지 좀 먹어보자는 더욱 원초적 이유로 뿌려졌으며, 아무도 그것이 더 예뻐야 한다거나 도태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그치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비닐하우스의 형성평가를 통과한 후 출하하는 과정 대신 스스로 비를 먹고 바람을 맞아 성장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 안 하면 인생이 쫑난다는 리스크에 대비하려고 열심히 수업 들으며 아마 가끔 창밖을 보았겠지요. 흙에서 스스로 그 다음의 목적 없이, 이를테면 자라나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봄이 되었기에 자라나서 결국 쑥쑥 올라와 꽃잎을 품는 해바라기를 내려다보았던 것이겠죠.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미친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온실에서 옮겨 심어져도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자란 줄 알고, 해바라기는 처음부터 열심히 자랐는데 천천히 관찰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올해 봄이 찾아오는 교정을 보며 스쳐갔던 1년생 해바라기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너른 휴식의 공간에 스스로 자라나는 공간도 그립습니다. 정원은 3개월만에 성계를 키워내는 닭공장과는 달라야 할텐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교정의 해바라기, 서울, 2007년 7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햇살을 보았죠.
그리고 노란 머리를 흔들며,
이웃에게 속삭였습니다.
"겨울은 죽었다."
– A. A. Milne, "Daffodowndilly", [When We Were Very Young]

(2015년 3월)

학교관찰기-02. 나는 누구인가


△ 서울, 2015. photo by rosapark

3월 모의고사를 치른 다음 날 밤, 우리 반 칠판이 서낭당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아이들의 사과문. 우리 반이 영어 꼴등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인용하며, 아이들이 칠판 가득 "선생님, 죄송해요."라고 적습니다.

– 송구하옵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모의고사… 죄송해요. 앞으로 열심히해서 성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 (우리에 대해?) 섭섭한 섭쌤.

– 이런 점수로 밥을 먹다니 .. 저는 쓰레기에요.

– 쌤 죄송해요 ㅠㅠ 이번에 진짜 열심히 공부할 거에요 ㅠㅠ

– 영어 선생님이 담임이신데 영어 꼴등이라니 참으로 죄송스럽사옵니다.

– 영어 꼴등 죄송해요.

– 모의고사 성적ㅋ 죄송해요 공부만 하겠습니다. 근데요 정말 .. 뒤에 서 계시면 집중이 안 돼요. 죄송해요.

– 선생님 많이 죄송해요. 앞으로 공부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ㅠㅠㅠㅠ
– 저두요 쌤
– 22222

– 많이 죄송해요. 영어 선생님이 담임일 자격이 없어요.

애들이 시험 못 봐서 어디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려나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성적 때문에 움츠러든 우리의 아이들이라니, 참교육은 어디 있냐고 통탄할 타이밍도 아니죠. 사실 성적이 이미 중요한 환경에서 "너는 왜 성적 때문에 속상해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가볍게 던지는 말은 이미 입시를 통과한 성인의 기득권을 말할 뿐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난장은 속상한 마음을 달래달라고, 그래서 살풀이의 형식을 빌어 흰백색의 보드 위에 흐르듯 써내려 간 아이들의 춤사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쁜 기운을 없애고 다시 의자에 앉기 위한 어떤 의식처럼 느껴졌어요. 알콜 냄새나는 마커들의 자욱들, 그 정신 사나운 그림을 전방에 두고 줄을 맞춰 다시 자리에 앉아 스걱스걱 펜으로 아이들이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을 때 대단히 대조적인 무언가가 교실에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방학 아이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이메일을 부탁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어김없이 거의 포함되었던 내용이 있었는데, 지난 자신의 나태함을 꾸짖으며 새로운 학기에 학업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이었죠.

– 저 진짜 2학년때는 진짜! 후회없게 공부해보려고 해용! 3월모의고사 잘 못봐도,,,, 너무 뭐라고하진말아주세용…… ㅠㅠ힝ㅜㅜ열심히하겠습니다ㅠㅠㅠㅠㅠ

– 저는 그저 즐거움에 빠지고 나태해져 정작 중요한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합니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 다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책을 많이 읽어도 글쓰는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 나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었지만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글쓰기 수상 경력이 현저하게 줄더군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햇살을 받으면서 오만과 편견을 읽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어린 것이 참 팔자가 좋았었네요.

–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많이 속상했고, 제가 하는 공부법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힉년 때는 이런 고민 하지 않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공부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 주말에나 방학때는 학원에 가거나 주로 학교에 와서 자습실에 있는편이에요. 집에 있으면 자꾸 늘어지고 제 자신이 컨트롤이 잘 안되서 학교에 나오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아직은 너무 낮은 제 성적에 대해 2학년때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고 싶어서 요즘은 제 목표나 과목별 계획을 조금 세우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4년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 나라에서 앞으로 살아갈 내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좀 더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심오한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 내가 사람들을 대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며,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을 미리 하다보면 집중력이 떨어지곤 합니다. 2학년 때에는 집중력을 높여 공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이틀 밤을 세고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 자지 않고 공부했던 중학교 때처럼의 간절함이 없어서 1학년 일 년 동안은 공부를 못했다고 말하기 전에 "안"했다고 반성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2학년 때부터는 당연히 아니여야 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도록 노력할께요 !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였는데 말이지요. 순서를 바꿔 읽어도 어색하지 않아요. 수십 통의 메일을 꼭 같은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동일한 의식을 공유합니다. ‘나’를 좀 보여달라는 정중한 요청에 아이들은 악귀를 물리치느라 바쁜 전투의 흔적들을 내보이며,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충성을 맹세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구요. 병사여,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 오늘은 왜 또 하얀 벽에다가 정신을 일고 뭘 휘갈겨 놓았소?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너희들은 규정되지 않는다. 너는 너다. 너인 너를, 사귀며 우리 한 해 동안 잘 만나자. 나는 나인 나로서만 너를 지켜볼게. 전쟁같은 공부도 중요하다. 하지만 전쟁을 이기기 위한 춤 말고, 그냥 훌라춤 같은 걸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출 때 그런 장면에 너 많은 ‘너’가 담겨 있고 그것에 대해 더욱 자주 이야기할 수 있어야 건강해진다. 건강하고 즐겁고 솔직한 우리로 만나보자.

우리는 장애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질병의 경험을 건강의 담론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모든 인류는 질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며, 노인이 되면 결국 ‘장애’라고 공인될 정도의 몸 상태로 변화한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일탈’이라고 규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자기 몸을 긍정할 순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 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푸른숲, 2010년, 140쪽.

(2015년 3월)

학교관찰기-01. 아이스크림과 관계지향성


△ "교무실 속 아이들, 누구일까?" 2013년 11월.

(관계지향성) 다른 학급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교복에 쏟아버렸을 때 휴지로 직접 닦아줌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는 대학 입시에 직접 활용되는 중요한 서류입니다. 대학에서는 지원하는 학생의 학교생활을 상세히 볼 수 있다며 "학생부 종합 전형"을 확대하고 있는 가운데, 모 입시정보 사이트에서는 학부모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하라는 차원에서 세세한 항목들과 항목별 분량, 요령까지 정리해서 올리고 있지요. 이 와중에 학생부라는 상자에 그럴듯한 ‘스펙’과 진로 탐색 흔적을 잘 포장해서 양도 푸짐하게 담아주는 학교는 좋은 학교가 되고, 그렇지 못한 학교는 능력이 없거나 방만한 학교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학생들의 학생부를 입학 전형 과정에서 아주 많이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 역량에 따라 똑같은 학생의 경험이 풍부하게 또는 빈약하게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맞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진가를 알아주고 꼼꼼하게 지도하고 멋지게 나에 대한 써줄 수 있는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선생님께는 정신 차리고 나에 관하여 더 많은 내용을 기재하라고 압박해야 나중에 손해 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비껴나와 이런 과열된 분위기 이면에 학생부의 칸 나눔이 일조한 건 아닌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항목으로 적도록 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이 난리통의 방향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보면 회의가 밀려옵니다. 가령 아이들의 인품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의견을 ‘(관계지향성)’, ‘(배려)’, ‘(나눔)’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적시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누가 자식을 키울 때 항목별로 특성을 고양하기 위해 계획을 짜나요? 피파 축구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아이들을 5각형에 집어넣어 평가해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구체적 칼날 앞에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들어갈 공간은 없습니다.

다시 위의 인용 문구를 봅니다. 어떤 학생이 들려준 이 사례를 관계지향성 항목에 써주어도 좋을까요? 관계지향성은 무엇이기에 하나의 항목으로 분리되나요? 저는 이 학생에 관해 다른 학생에게도 물었는데 "정의롭고 약자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또 사회에 관심이 많다. 논문을 쓰는데 정책이나 정치 같은 데에 비판의식을 가진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런데 정작 왜 본인은 멋있는 말을 두고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 걸까요? 작년에는 샤프심이 없어서 대신 외출을 받아 친구의 샤프심을 사 준 이야기를 생활기록부의 학교생활 사례에 언급해달라는 아이가 있었죠. 웃고 넘어갈 에피소드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종일 이 예쁜 아이들과 학교에서 먹고 사는 저는 아이스크림을 닦아주고, 미드에 푹 빠져서 잘생긴 배우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원피스를 챙겨 보고, 고작 친구의 샤프심 하나 때문에 점심 시간에 문방구에 뛰어다녀오는 모습이 어른들이 원하는대로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다. 논문을 쓰는데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쓴 것에 비해 그 아이를 잘 설명하는 듯 합니다.

만약 올해 유명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입수하여 그 아이들의 "행동특성" 칸을 읽어본다면, 아이스크림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까요? 정치인들에게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며 그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에요. 누가 아이스크림 이야기 따위를 쓰는 게 창피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애인을 사귈 때는 항목별로 검토하지 않으면서 결혼 중개업소 마냥 아이들의 됨됨이를 항목화하고 있는 걸까요?

사진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 내 말 한 마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해적에게 잡혀 눈이 가려진 채, 선상 끄트머리로 걸어가며 당장에라도 ‘멈춰’ 하는 말이 떨어지길 애원하는 선원의 심정이랄까.
– 필립 퍼키스, "책을 펴내며", <사진강의 노트>, 안목, 2011년.

(2015년 2월)

사진노트 강의를 마치며

‘사진찍자’고 제목 붙여 ‘사진노트’ 말머리로 슬로우뉴스에 연재해온 이 글뭉치는 사실 2011년 말부터 써두었던 쪽글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은평구에서 장애아동들과 토요일마다 놀아주는 ‘토마토학교’에서 애들 사진을 많이 찍어주었어요. 하루 다녀오면 낮에 찍은 사진이 1,000여 장에 달했는데 저녁에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 리뷰할 때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 후 몇 시즌을 더 같은 아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사진이 예뻐서 숨 막히는 기분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빛을 2차 평면에 담는 이 매체와 기계의 매력은 과연 땀나는 하루와 사연이 더해질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는 걸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에 대한 내 나름의 공부 노트를 써두자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정말 제게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가끔 제게 질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생로병사 다큐멘터리 보며 이면지에 받아적은 점방 주인에게 병을 치료해달라 부탁하는 격이라고 할까요? 훌륭한 강좌와 책과 사진 찍는 모범이, 무엇보다 너무나 아름다운 피사체들이!! 저어기 밖에 널려 있으니 찌라시로 훑어적은 이런 말 놀음은 가벼이 읽어주셨으면, 그래서 괜히 제가 쓴 무슨 말 때문에 "내가 인터넷에 보니까 사진이 이런 거라던데?" 따위의 생각일랑 절대 품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서울 은평구, 2011년.

남아 있는 걱정

뭐든 막상 말로 정리하려고 하면 쉽지 않잖아요? 슬로우뉴스에서는 사진노트를 순서대로 번호 매겨서 게재했지만, 원래 저는 사진의 시선과 방향, 렌즈의 초점거리와 화각, 사진의 노출, 사진의 표현과 사진가의 의도, 사진파일의 관리와 보관, 라이트룸 다루기, 포토샵, 사진가에게 유용한 기타 프로그램, 스피드라이트와 사진 조명, 사진의 역사와 사진가들, 현대사진 이야기 등으로 주제를 나누어 1-1, 1-2와 같이 소주제로 분절하여 ‘사진’에 대하여 공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룸이나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 매뉴얼 강좌는 굳이 제가 계속해서 작성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고 또한 저 스스로 사진파일을 이제 아이폰과 맥북에서 거의 보정/백업하고 있어서 집필을 포기했어요. 사진 조명은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어서 겉핥기도 불가능하더군요. 사진의 역사와 사진가들은 아직도 구경 다니고, 읽을 게 너무 많아서 제 관점을 담아 글을 써낼 깜냥이 되지 못하네요.

게다가 이렇게 시리즈로 엮어 공개해버리니까 체계적이고 사전식 정보를 게재하는 일이 ‘사진을 찍는다’는 행동에 동맥경화를 유발하는 게 아닐까 의심합니다. 마치 좋은 사진이란 것이 어딘가에 있는데 준비를 잘한 사람은 카메라에 그것을 건져낼 것이고, 정보지식이나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요. 대어를 낚을 꿈을 꾸는 어부의 유비인데, 그것은 스포츠나 찰나의 순간을 건져 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 장소와 시점과 찬스를 물색하는 사진가들에게는 적합할지 몰라도 전 그런 유비가 해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들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와 같이 제목을 달아 책을 찍어내듯 공포를 마케팅하는 보험회사와 다를 바 없는 접근이라 생각하지요.

좋은 사진보다 중요한 건 좋은 기억

좋은 사진은 아직 낚지 못했으나 미미한 확률로 남아 있는 어떤 ‘인상’이 아니라 정신없는 하루 뒤에 별안간 찾아오는 한숨이나 탄식 같은, 좀 더 생리적인 경험입니다. 그것은 100% 우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기획할 수도 없어요. 어떤 사진은 수년을 돌아 다시 나타나 갑자기 다시 말을 건네기도 하고, 어제 강렬했던 젊은 날의 이미지가 오늘 아침에는 늙은 주름처럼 푸석한 사진 한 장이 됩니다.

따라서 경험을 사진으로 무언가 남긴다는 과업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딸아이의 노래 부르는 장면을 물고기처럼 낚으려고 객석의 모든 엄마가 딸의 눈을 마주하는 대신 캠코더나 카메라의 LCD만 보고 있습니다. 집에 와서 딸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모니터로 확인하면서, 엄마가 말합니다. "얘가 왜 웃질 않지?" 그 표정이 그 표정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하지요. 엄마는 무엇을 찍었습니까? 그날 찍은 것은 딸 아이의 현장이 아닙니다. 딸 아이의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캠코더만 보고 있는 모습을 딸 아이에게 경험하도록 하는 어머니의 무심함 자체였던 거죠. 그것은 건져 올린 커다란 죽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이토록 이야기 안으로 깊숙이 삽입되는 사진 찍는 일과 사진가의 경험이란,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 사진을 찍는 것을 사진이라 부르라고 말합니다. "괜찮아, 아빠가 다 눈으로 담았어."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기엔 말도 못하게 아름다워서 안 찍기로 했어." 이미징 도구가 과잉인 시대에 오히려 희소하고, 유일하면서, 가장 개성 있게 사진 찍는 방법이 아닐까요? 사실 근사한 이미지와 왠지 너무나 매끄러운 감동휴먼스토리는 매일 네이버 뉴스에 올라오는데 어차피 내가 찍는 사진으로는 ‘충격’, ‘뒷태’, ‘경악’ 키워드 실시간 검색 리스트에 명함도 못 내밀지 싶어요.

그렇다고 사진기를 두고 다니거나, 카메라 앱을 뒤로 밀어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꾸 어디서 본 사진들과 겨루지 마세요. 단지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이미 좋은 ‘빛’이 아니던가요.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사진 찍으러 나갈게요.

(2015년 1월)